빌 클린턴 미국 전 대통령은 재임기간 중 백악관 인턴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스캔들로 탄핵 직전까지 내몰리는 수난을 겪었다. 사안의 심각성이야 어찌됐든 전세계 시민들은 적어도 한번쯤 이 스캔들로 이야기 꽃을 피웠을테고 클린턴은 한마디로 완전히 스타일을 구긴 셈이다.
감히 일국의 대통령을, 그것도 ‘팍스 아메리카나’ 시대를 이끄는 미국의 대통령을 훌륭한 ‘안주거리’로 전락시킨 장본인을 당장 잡아다가 호통이라도 치고 싶었겠지만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눈에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도 않는 ‘소문’이라는 아주 짓궂은 녀석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기원전 400년경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얽힌 소문에서부터 최근 클린턴의 성추문에 이르기까지 소문이 만들어낸 세기의 ‘역작’들을 소개하면서 소문의 생성과 유포의 메커니즘을 분석하고 있다.
소문은 언제나 불특정 다수를 근원으로 하기 때문에 종종 가볍게 웃어 넘겨야할 대상으로 취급돼 왔다. 그러나 세계 역사상 소문이 저지른 굵직한 ‘대형 사고’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아테네의 정치가 티마이오스는 상습 매춘을 했다는 근거없는 소문으로 파멸됐고, 폭군의 대명사 네로 황제는 트로이아의 몰락을 찬양했다는 소문을 잠재우기 위해 최초로 기독교 박해했다.
특히 소문은 ‘전쟁’이라는 고약한 녀석과 매우 절친한 사이여서 이 둘이 만났다 하면 엄청난 폭발력을 가지게 된다. 전쟁은 위험과 불안정의 혼재를 초래하며 이 상황은 갖가지 소문과 억측이 비집고 들어갈 틈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군인이 벨기에의 갓난아이들을 총검과 단도로 살했했다, 걸프전에서 이라크 군인들이 인큐베이터에 누워있는 조산아들을 먹어치웠다는 등의 소문은 그 황당함과 억지스러움이 지나칠수록 오히려 더 공고한 응집력을 가지고 유포됐다.
1940년대 초반 진주만 공습과 60년대 후반 미국의 흑인운동 지도자 마틴 루터킹 목사의 죽음 이후 발족된 수십 여개의 ‘루머 클리닉’과 ‘루머 통제 센터’는 국가 위기 사태 발생시 소문이 갖는 위력을 여실히 증명해준다. 이 단체들은 갖가지 소문을 수집하고 분석해 이를 퇴치하기 위해 왕성한 연구활동을 벌였으나 그 끈질긴 녀석은 좀처럼 항복하지 않았다.
요즘 소문은 ‘인터넷’ 공간에 새 둥지를 틀면서 ‘물 만난 고기’처럼 최대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한 사람이 수백, 수천만의 사람에게 동시다발적으로 소문을 전할 수 있는 매체가 탄생했으니 말이다. 클린턴의 스캔들도 ‘드러지 리포트’라는 웹사이트를 통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지난해 우리 사회에도 인터넷을 통해 모 여가수의 성관계 비디오가 일파만파 전파된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다. 이 책은 이처럼 우리 생활 도처에 잠입해 자신의 위력을 만방에 알리고는 소리없이 사라지는 소문의 실체를 역사적, 문화적 맥락에서 꼼꼼히 짚어주었다. 이 책에 소개된 풍부한 예화들만으로도 읽을 가치는 충분하다.
<김수경기자>sk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