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관통하는 예리한 눈, 삶을 보듬는 따뜻한 가슴, 그리고 ‘죽어야 끝나기가 쉽다’는 치열한 고뇌…. 당연하지만 오랫동안 잊어왔던 덕목들을 화들짝 일깨워주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익히 알려져있듯, 김학철씨(85·사진)의 삶은 소설보다 드라마틱했다. 목숨을 내놓았던 항일 무장독립운동, 해방후 북한 정권을 비판하고 중국으로 망명, 문화혁명기 필화사건으로 30년 넘는 노역과 징역 생활….
그래서 장편 ‘격정시대’ ‘20세기의 신화’나 자서전 ‘최후의 분대장’ 같은 대표작은 현대사를 온몸으로 헤쳐나온 사람만이 쓸 수 있는 한국문학의 지주와 같다.
그러나 본인은 양장 제본된 ‘김학철 문집’을 받고는 착잡한 맘을 감추지 않는다. 돌아보면 ‘소설인지 르포인지 아니면 숫제 자료집인지’ 도무지 분간할 수 없으며, ‘예술성 또는 문학작품적 가치도 수준미달’이라고 당당하게(?) 이야기한다.
모교인 서울 보성고등학교에서 준 상패에 적힌 ‘혁혁한 전과’ ‘문단의 거봉’ 그리고 ‘정신적 지주’라는 구절에도 손사레를 친다. 누가 혹 그를 ‘과소망상증’이라고 비아냥거린다해도 선선히 받아들일 자세다.
이 책에 실린 28편의 글은 ‘장백산’ ‘연변일보’ 등의 매체를 통해 중국 동포사회에 발표한 것이다. 한편에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 세태를 중엄하게 꾸짖는 당당한 기백이 있는가하면, 평생 고생만 시킨 아내에게 다짐하는 ‘충성 서약’과 같은 푸근한 웃음이 있다. 성성한 백발을 휘날리면서 치열한 산문정신의 정점으로 달려가는 작가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는 “앞으로 소설과는 영원히 결별하고 산문과 해로동혈(偕老同穴)하겠다”며 만년의 결의를 다진다. 몽매한 중국인민을 날선 풍자로 깨우쳤던 문필가 루쉰(魯迅;1881∼1936)을 염두에 뒀음일까. 책 곳곳에서 반짝이는 풍요로운 속담과 고유어 만큼은 루쉰도 한 수 배워야 할 것 같다.
<윤정훈기자>digan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