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서지문/사이비 페미니즘은 가라

  • 입력 2001년 7월 1일 18시 36분


재작년인가, 어떤 저명인사가 여성지에 기고한 글에서 자기 아버지가 ‘페미니스트’여서 잦은 외도로 인해 어머니가 마음 고생을 많이 했다고 술회한 것을 보고 어이가 없었다.

물론 ‘페미니스트(feminist)’와 ‘엽색가(womanizer)’를 혼동한 사례를 처음 보는 것은 아니었다. ‘페미니스트’라는 단어가 처음 통용되기 시작했을 때는 여성의 적(敵)인 엽색가가 자신이 ‘페미니스트’라고 떠벌리는 것을 가끔 보았다. 페미니스트는 여성을 인격체로서 존중하는 사람이고 엽색가는 여성을 성적인 대상으로 애호(?)하는 인간으로서 완전히 상반되는 종류의 사람인데, 정말 터무니없는 일이었다.

20세기 말에, 첨단의식을 가진 것으로 알려진 인사가 ‘페미니스트’라는 말을 그렇게 쓴다는 것은 통탄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유머러스한 효과를 위해서였는지 모르겠지만 여성과 페미니스트에 대한 지독한 모욕이다.

요즈음 개념에 대한 무지 내지 오해에서가 아닌, 진짜 위장 ‘페미니스트’들이 ‘성업중’인 것 같아 몹시 걱정스럽다. 여성이 받는 부당한 차별에 대해 분노를 느끼며, 여성의 권익 신장을 돕는 것을 정의로운 투쟁으로 생각한다는 식으로 떠벌려서 여성들의 환심과 신뢰를 얻고, 친구이자 동지로 행세하면서 여성들을 기만하는 무리이다.

물론 남성 페미니스트들을 다 불신하자는 말은 아니다. 오늘날 이만큼의 여성지위 향상은 남성 페미니스트들의 도움 없이는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남성 페미니스트들이 여성들의 감사와 신뢰의 대상이기 때문에 페미니스트를 가장하고 여성에게 접근하는 사이비 페미니스트들이 생긴다. 이런 ‘가짜’들의 최종목표는 대개 여성과의 ‘부담없는’ 성관계이다. 요즘 많은 신문, 잡지들이 “여성들이 성을 향유할 권리를 주장하고 있다”고 대서특필하고 있는데, 위장 페미니스트들에게는 최상의 원군이다.

아내들이 성을 향유할 권리를 찾기 시작했다면, 여성의 권리가 신장되고 가정에서의 입지가 확고해졌다는 증거로서 매우 환영할 만한 현상이다. 그러나 나는 정말 대다수의 여성이 화려하게 성적 권리를 향유 내지 추구하고 있다고 믿지 않는다. 오늘의 대학생들은 우리 때보다 훨씬 발랄하고 남녀교제도 보편화되었지만, 대부분의 여학생들에게 ‘성’은 ‘권리’이기 이전에 곤혹스럽고 고민스러운 것이라고 생각된다. 반면에 인터넷 토론광장 같은 데 올라오는 남학생들의 글을 보면 정말 구시대적인 의식에 절어있는 신세대 남성들이 아직도 많다.

이번 학기에 영국소설 과목에서 ‘테스’를 읽었는데, ‘테스의 불행에 대한 에인젤과 알렉의 책임 비율을 논하라’는 시험문제를 내었더니, 테스의 육체적 순결을 빼앗은 알렉의 책임이 더 크다는 의견을 피력한 학생이 더 많았다. 그리고 단순히 성적인 순결을 잃었다고 해서 지고, 지순한 테스의 사랑을 내팽개친 에인젤의 행동에 대해서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라고 대답한 학생들도 있어서 놀라웠다.

아직도 이렇게 보수적인가 싶은데, 한편 부풀려진 ‘여성의 성적 권리 찾기’ 같은 논의들이 아직 미성숙한 젊은 여성들에게 성해방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심어 줄까 두렵다. 여성들이 마치 순결을 지키는 것이 시대에 뒤떨어진, 해방되지 못한 여성이라는 식의 관념을 갖게되어 남성의 부당한 성적 접근을 단호하게 물리치지 못한다면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

요즈음 조명받는 남녀 성평등의 담론이 실상보다 여성의 권리가 더 신장되어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고 생각될 때가 많다. 그래서 (특히 고학력의) 여성들은 남성에 대해 경계심을 너무 안 갖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그러나 사회적, 생리적, 심리적으로 남녀간의 불평등은 엄연히 존재한다.

남녀의 생리적 조건의 차이로 인해 신체적으로도 여성은 성에 대해 훨씬 큰 부담을 지고 대가를 치르게 된다. 더욱이 신뢰했던 남성에게 성적인 도구로 이용당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정신적 상흔을 극복하기 매우 어렵다. 신세대 여성들은 여성의 진정한 성해방의 출발점은 어떠한 경우에도, 어떤 방식으로도 성적으로 이용당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라는 점을 확실히 인식해야 한다.

서지문(고려대 교수·영문학, 본사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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