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박기현/한국위상 드높인 '황진이'

  • 입력 2001년 7월 4일 18시 35분


400여년 전의 한 여인이 시대를 훌쩍 뛰어넘어 21세기에 ‘극적인 환생’을 하였다.

베이징(北京)에서는 ‘태백의 장주가’를 불러 중국인을 감탄시켰고, 도쿄(東京)에서는 한국의 아름다운 시조들을 읊어 일본 천황까지 감동케 했다. 정신의 자유와 풍류의 극치를 추구하며, 열정적이면서도 순수한 삶을 산 이 여인은 극장을 찾은 중국과 일본 사람들이 제각각 다른 모양의 놀라움을 지닌 채 돌아가게 했다.

이 여인은 ‘황진이’로, 창작오페라 ‘황진이’의 주인공이다. 유명한 정치인도, 권력가도, 돈 많은 재력가도 아닌 일개 오페라 속의 프리마 돈나가 만들어낸 문화적 성과였다.

오페라는 문화의 중심에 서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장르가 결합된 종합예술이다. 문화선진국에서 오페라는 한 국가가 문화예술 전반에 얼마만한 관심을 갖고 있느냐 하는 척도의 의미를 갖는다. 국내에 오페라가 수입된 지 이제 50여년…. 척박한 여건이었지만 버젓한 오페라극장도 생겼고 애호가도 제법 늘어 이제는 매년 수십 편의 오페라가 무대에 오르고 있다.

많은 한국인들은 이미 외국작품을 통해 충분히 감동을 경험했고, 필자 또한 10년 넘게 서양오페라 제작에 열중했었다. 베르디의 오페라 ‘운명의 힘’ 서곡에 전율을 느꼈고, 푸치니의 ‘공주는 잠 못 이루고’에 눈물도 흘렸다. 그러나 항상 남의 옷을 잠깐 빌려 입었다 돌려주고 난 뒤의 허탈함과도 같은, 채워지지 않는 듯한 부족감은 어쩔 수 없었다. 그것은 진정한 우리 것이 아닌 ‘복제문화’였기 때문이다. 한국의 창(唱)을 외국인이 더 잘할 수 없듯이, 아무리 뛰어난 연주를 해도 그네들의 음악이고 문화일 뿐이었다.

그래서 한국에도 세계 사람들이 사랑하고 감동할 수 있는 창작오페라가 있다면 참으로 신날 것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히곤 했다. 고심 끝에 내린 결론은 우리에게 남는 것은 ‘창작’뿐이며, ‘메이드 인 코리아’가 지닌 독창성만이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오페라 ‘황진이’는 그래서 만들어졌다. 스스로 만든 한국의 음악에, 한국의 예술인들이, 외국 오페라 제작 시스템으로부터 배운 기술력을 바탕 삼아 외국 관객에게 선보였다. 일본 공연에서 협연을 맡았던 일본 최고의 교향악단 ‘도쿄필’이 우리 음악을 연주하고 징과 꽹과리를 칠 때는 강한 자부심과 문화적 우월감을 느꼈다.

서양 오페라에만 의존하고 익숙해 있던 일본인들에게도 한국의 창작오페라는 신선한 충격이었나 보다. 일본의 한 신문은 “먼 나라 음악에만 취해 정작 가장 가까운 이웃 나라의 음악을 몰랐고, 그 수준마저 가늠하지 못했다”는 자탄의 목소리를 실었다.

요즘 한중일간 문화상품을 통한 문화외교정책 싸움이 치열하다. 공연 준비를 위해 여러 차례 중국을 방문하면서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도입으로 눈부시게 발전한 거대 도시의 모습과 잠재력에 놀랐지만 더 큰 충격이 있었다. 바로 문화에 대한 중국 정부의 치밀한 장기 정책과 막대한 재정투입, 그리고 관료들의 열린 ‘문화 마인드’였다. 문화부 공무원들이 사무실에 없는 경우가 많아 처음에는 의아하게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대부분 ‘해외 출장 중’이었다. 사회주의 문화정책의 모순과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선진국의 좋은 정책 프로그램을 연구하려고 많은 공무원을 해외로 보내고 있다는 설명이었다.

일본도 순수예술 및 오페라에 대해서는 국가와 각종 문화재단이 든든한 뒷받침을 하고 있다. 문화예술인들은 단지 좋은 공연을 기획하고 연습하는 데만 전력을 다할 뿐이다.

이렇듯 든든한 국가의 뒷받침이 있는 나라와의 경쟁에서 민간단체의 힘만으로는 뒤질 것이 뻔하다. 한국의 창작오페라가 아직 ‘춘희’만큼 귀에 익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창작오페라라는 이유만으로 정부와 국민의 외면 속에 빛을 제대로 발하지 못하고 사장돼서는 안된다. 창조가 없는 나라는 비전과 미래가 없다. 순수예술의 육성과 여건 조성 없이는 문화산업 논리도 시기상조일 뿐이다.

차이코프스키나 모차르트는 후손에게 황금보다 더 귀한 음악을 물려주었다. 우리도 자손들에게 물려줄 문화유산을 국가가 직접 나서 챙겨야 할 때다. 세계인들이 오페라 ‘황진이’의 아리아 하나쯤 익혀 곳곳에서 부를 날이 오면 얼마나 좋을까.

박기현(한국오페라단 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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