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베이비부머들은 경제적 안정 속에서 대부분 고등 교육을 받고 좋은 직장을 구할 수 있었던 ‘혜택받은’ 세대로 꼽힌다. 이들 세대의 공통된 특징 가운데 하나는 은퇴 이후의 삶에 대한 관심이 무척 높다는 점. 이들이 사회의 중추 세력으로 성장한 70년대 중반부터 금융권에서 노후를 대비한 자산 증식이 주요한 관심사로 부상한 것도 이 때문이다.
후튼증권이 랩어카운트를 처음 선보인 것도 바로 이 무렵이었다. 저금리로 인해 은행에서 주식시장으로 관심을 돌리긴 했지만 직접투자의 위험이 부담스러웠던 개인투자자들로선 희소식이었다. 전문가들이라면 안전하게 자산을 굴려서 은퇴 이후 필요한 자금을 마련해줄 수 있으리라는 믿음에서였다. 랩어카운트가 생긴 배경에서 볼 수 있듯 이 상품은 무엇보다 ‘안전성’을 기본으로 한다.
9일부터 한국에서도 증권사가 고객의 자산을 알아서 굴려주는 일임형 랩어카운트가 허용됐다. 이전까지의 자문형은 증권사측이 조언만 해주고 투자는 고객이 직접 결정하는 방식이었다. 원래 의미의 랩어카운트는 이제야 허용된 셈이다.
하지만 증권사 관계자들은 일임형 랩어카운트가 당장 호응을 얻기 힘들다고 입을 모은다. 예탁금의 30%를 투기등급 채권에 의무적으로 투자해야한다는 제한 때문이다. 부도날 가능성이 높은 채권에 운용자산의 3분의 1을 쏟아넣어야 한다는 얘기다. 랩어카운트의 기본인 ‘안전성’에 어긋난다.
정부가 일임형을 허용해주면서도 이런 단서를 붙여 어정쩡한 상품으로 만들어버린 이유는 간단하다. 부실기업 채권을 유통시키려는 목적이다. 증권가에서 “누구를 위한 상품인가”라고 묻는 것도 바로 이 대목이다. 고객을 위해 선진 상품을 도입한다는 취지보다는 정책적인 고려가 앞선다는 지적이다.
최근 선보이는 신상품에 ‘비과세’가 유행처럼 붙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된다. 원금의 일정 부분을 투기등급 회사채에 투자해야하는 비과세 고수익채권펀드가 대표적인 예로 꼽힌다. 투자 부적격 채권이 최근 1년간 거의 거래가 안 이뤄지자 ‘비과세’라는 사탕을 발라 투자자를 유인하려는 의도라는 것.
이밖에도 ‘주가 떠받치기용’이라는 소리를 듣는 비과세 근로자주식저축 등 10여개에 이르는 비과세 상품에는 대부분 정책적인 속셈이 엿보인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그렇게라도 머리를 짜내서 금융시장을 안정시키려는 정부의 노력은 높이 살만하다. 하지만 ‘내 돈의 안전’을 중요시하는 ‘순진한’ 투자자들을 그럴듯한 미끼로 유인하려는 의도가 앞서서는 곤란하다.
<금동근기자>go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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