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허영/통일헌법 공론화 이르다

  • 입력 2001년 7월 10일 18시 36분


민주당 진영에서 학술모임의 형식으로 갑작스럽게 통일헌법 문제를 들고 나왔다. 그 핵심적인 메시지는 두 가지다. 지금이 통일헌법을 논의하고 준비해야 할 적절한 시점이라는 것과 통일헌법을 논의하는 데 있어서는 우리 헌법만을 기준으로 삼는 편향된 경향을 보여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두 가지 메시지 모두 너무 어처구니없는 황당한 내용이다.

지금이 과연 통일헌법 논의를 공론화해서 통일헌법을 준비해야 할 적절한 시점인가. 통일헌법에 관심 있는 전문 학자들이 연구실에서 나름대로 통일헌법의 모습을 천착해 보는 것은 시기에 상관없이 언제나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지금 집권 여당이 통일헌법 논의를 공론화해서 정치의 장으로 끌어낸다면 통일헌법에 관한 논의와 합의가 정치권에서 제대로 이뤄질 수 있다고 믿는 것인가.

그렇지 않아도 국내정치가 갈등과 대립으로 일관하고 있는 판에 또 하나의 갈등요소를 추가하려는 진정한 의도는 무엇인가. 구태여 일부에서 제기하는 재집권을 위한 각본에 따른 음모론을 거론하고 싶지도 않고 믿고 싶지도 않다. 재집권이 그런 각본과 음모에 따라서 성취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각본과 음모에 따라 통일헌법이 만들어진다고 해도 주권자인 국민이 선택하지 않는 재집권은 불가능한 일이다. 더욱이 남북관계가 교착상태에 빠진 시점에서 통일헌법을 논의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 의문이다. 북한을 다시 대화의 장으로 끌어내기 위한 수단인가, 아니면 북한에 주는 또 다른 이데올로기적인 선물인가.

통일은 대한민국과 북한이 하는 것이지, 일부 정치세력과 북한이 통일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나라에서 모든 정치 세력의 통일헌법 논의에 관한 합의가 선행돼야 한다. 야당이 통일헌법 논의 자체를 반대하고 있는 상황에서 누구를 상대로 통일헌법을 논의하겠다는 것인가. 야당을 무시하고 직접 국민을 상대로 통일헌법을 논의해 볼 생각이라면 우리 헌법이 채택한 대의민주주의는 용도 폐기한다는 얘기가 된다.

‘통일을 원하는가’라는 여론조사결과가 통일헌법을 찬성하는 것으로 왜곡되고 그것을 근거로 국민투표로 통일헌법을 만들겠다는 의도라면 그것은 또 하나의 헌정질서 문란 행위이고 탄핵 대상이다. 헌법에 통일정책에 관한 국민투표 규정이 있긴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정책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국회를 뛰어 넘어 통일헌법을 직접 국민투표에 부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통일헌법은 일단 국회의 의결절차를 거친 후에 국민투표에 부치게 돼 있다. 따라서 국민을 상대로 한 통일헌법 논의보다는 먼저 야당을 상대로 국회 내에서의 논의를 선행하는 것이 순서다. 야당이 응하지 않는 통일헌법 논의는 무의미한 일이다.

무릇 새로운 헌법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헌법 제정이나 개정에 관한 사회 구성원의 폭넓은 공감대가 형성돼야 하고 사회 구성원의 적극적인 참여의식이 발동해야 한다. 지금 우리 사회는 그런 공감대와 참여의식이 존재한다고 볼 수 없는 심각한 갈등 상황이다. 정부 여당은 통일헌법 논의에 앞서 사회의 분열현상을 해소하기 위한 논의와 노력부터 서두르는 것이 올바른 순서이다.

통일헌법 논의에서 우리 헌법만을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된다는 주장은 한마디로 헌법 파괴적인 혁명적 발상이다. 우리 헌법은 분명히 자유민주주의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유민주주의를 희생시키는 그 어떤 통일도 헌법은 단호히 배척하고 있다. 따라서 통일헌법 논의에서는 당연히 헌법이 규범적으로 명령하고 있는 자유민주주의의 헌법적 가치를 기준으로 하는 것이 당위적 과제다. 그런데도 집권당의 외곽단체가 헌법적 가치를 경시하는 통일헌법 논의가 바람직하다고 화두를 던지는 것은 참으로 묵과하기 어려운 위헌적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우리 헌법은 결코 통일지상주의 헌법이 아니다. 통일은 자유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수단이어야지, 자유민주주의가 통일의 희생물이 되게 해서는 안된다. 1972년 동서독 기본조약이 체결될 때 독일 연방헌법재판소가 서독기본법의 규범적인 효력을 조금이라도 약화하거나 훼손하는 조약의 체결과 해석을 강력히 금지하는 판결을 한 것을 정부 여당은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

허영(연세대 교수·헌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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