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의 대중문화 째려보기]처음처럼

  • 입력 2001년 7월 13일 13시 28분


성시경의 감미로운 발라드 <처음처럼>이 흐릅니다. 시간의 위력을 맛보기 전, 그 첫마음으로 돌아가서 다시 사랑을 하고 싶다는 노래지요. 시간을 거스를 수 없는 만큼 그 바람은 더욱 큰 울림을 줍니다.

텔레비전을 처음 보았던 적이 언제였던가요? 안방 나무틀 속에 담겨 있던 14인치 흑백 텔레비전이 떠오릅니다. 국민학교 1학년 눈에 비친 텔레비전은 굉장히 큰 마법상자였습니다. 아버지의 발 밑에 턱을 괴고 앉아 뉴스도 보고 쇼쇼쇼도 보고 프로복싱도 보고 주말의 명화도 보았습니다. 어머니는 공부도 하지 않고 잠도 자지 않고 텔레비전만 본다며 나무라셨지요. 그때 아버지는 나와 어머니를 슬쩍 곁눈질하시고는 또다시 텔레비전 속으로 들어가셨습니다.

마징가Z와 6백만불의 사나이를 흉내내기 위해 철판을 모아 무쇠팔을 만들고 색종이와 나무조각으로 인조눈을 그렸지요. 제가 만든 무쇠팔은 날아가지 않았고 인조눈은 한 치 앞도 볼 수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래도 걱정 없었지요. 일주일만 기다리면 어김없이 '마징가Z'와 '6백만불의 사나이'가 텔레비전에 모습을 드러냈으니까요.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그저 스쳐가듯 텔레비전을 보았지요. 텔레비전보다는 이종환 아저씨의 <밤의 디스크쇼>나 <밤을 잊은 그대에게>를 더 좋아했습니다. 부모님과 함께 텔레비전을 보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것이지요.

대학에 입학하면서 고향을 떠나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그때부터 8년 동안 기숙사와 하숙과 자취 생활을 했지요. 서너 차례 이사를 다니는 동안에도 화면에 자주 비가 내리는 텔레비전만은 끼고 다녔습니다. 학교수업이 끝나고 방으로 돌아오면, 제일 먼저 텔레비전을 켰지요. 그리고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이 흐를 때까지 텔레비전과 함께 생활했습니다.

결혼을 하고 좋았던 것 중 하나는 아내 역시 텔레비전을 즐긴다는 사실이었지요. 케이블방송의 시작은 우리에게 큰 축복이었습니다. 다큐멘터리 채널과 영화 채널을 보고 앉았노라면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딸아이가 태어난 후로는 만화 채널도 우리 가족이 좋아하는 방송이 되었지요.

<호모 비디오쿠스>란 단편영화가 나왔을 때, 저는 그 제목에 전적으로 공감했습니다. 그래서 감히 1년이 넘도록 주제 넘게 텔레비전을 보며 무엇인가를 써왔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요즈음은 텔레비전을 보면서 자꾸 그 텔레비전 안으로 몰입하는 것이 아니라 그 텔레비전 밖을 살피게 됩니다. 인기 연예인들이 단체로 나와서 기자회견을 하는 것을 보면서, 이제 텔레비전 안의 세계만 분석할 것이 아니라 그 바깥의 고통과 상처까지도 보듬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텔레비전이 지난 시절 저에게 위안이 되었듯이, 이제 텔레비전을 향해 위로와 격려를 보낼 때가 된 것도 같습니다.

시인 황지우는 텔레비전을 보며 선(禪)을 한다고 적었습니다. 저는 이 표현이 비유나 상징이 아니라고 봅니다. 정말 현대인들은 그 무엇보다도 텔레비전을 보며 배우고 고민하고 웃고 우는 것이지요. 책을 쓰는 것이 본업인 저로서도 텔레비전의 이 다정다감함 앞에서는 속수무책입니다.

문학에서도 상호텍스트성이 문제이고 인터넷에서도 쌍방향 소통이 화두입니다. 텔레비전도 분명 달라지겠지요. 감히 그 변화를 예측할 능력이 저에게는 없습니다. 다만 저는 앞으로도 텔레비전 앞에서 텔레비전과 함께 늙어갈 것입니다. 일찍이 프랑스의 철학자 바슐라르는 시적 영감이 책과 램프 사이에서 나온다고 하였지만, 저는 오히려 예술적 상상력이 텔레비전과 살찐 소파 사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문명을 버리고 자연으로 돌아가는 생태론자들이 늘어나고 있지만 저는 결코 텔레비전을 버리지 않을 겁니다. 이건 문명 이전의 실존인 것입니다. 이런 태도가 잘못되었다고 비난받더라도 어쩔 수 없습니다. 텔레비전은 저의 기억이자 편견인 게지요. 다만 아쉬운 것은 국민학교 1학년 시절, 학교에서 돌아와서 가방을 던져놓고 들판을 뛰놀다가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하면 다람쥐처럼 방으로 들어와서 손도 씻지 않고 텔레비전을 켜던 그 순간의 설렘은 더 이상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시경의 노래가 더욱 감미로운 것이겠지요. 처음처럼.

소설가 김탁환(건양대 교수) tagtag@kytis.kony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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