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흥미진진한 지식소설 '알도와 떠도는 사원 1,2'

  • 입력 2001년 7월 13일 18시 47분


■'알도와 떠도는 사원 1,2'/ 김용규 지식소설/ 각권 270쪽내외 8000원/ 이론과실천

먼저 출판 담당기자로서 부끄러운 고백부터 해야겠다. 몇 가지 오해 때문에 이 책을 건성으로 넘겨짚었을 뻔 했기 때문이다.

오해 중 하나는 이 책은 필시 비싼 로열티를 주고 들여온 번역서일 것이라는 착각이었다. 물론 표지에 적힌 영어 제목만 보고 미루어 짐작한 것은 아니었다. 도입부부터 ‘태양의 도시’가 천지개벽으로 종말을 고하는 장엄한 묘사에 압도됐고, ‘알도’라는 낯선 이름의 주인공 소년이 인도라는 이국에서 벌이는 흥미진진한 스토리에 매혹됐기 때문이다. 이만한 품질과 내공을 갖춘 소설이라면 열에 아홉은 수입품이란 것이 출판기자의 ‘감’이었다.

오해 중 또다른 하나는 이 책이 흔히 볼 수 있는 ‘소설로 풀어쓴 철학서’의 아류일 것이란 성급한 판단이었다. 초반 몇 페이지를 넘겨보다가 합리론과 연역법, 경험론과 귀납법, 칸트의 구성주의 등의 용어만 슬쩍보고 넘겨짚은 불찰이다. 자유와 평등론, 사회진화론 같은 사회사상이나 프렉탈 이론이나 게놈 프로젝트 등 과학지식에 대한 통찰까지 파악하기 위해서는 진중한 독서가 필요했다.

이처럼 출판기자의 감식안을 시험에 들게 한 ‘알도 시리즈’에는 ‘철학소설’이나 ‘과학소설’이 아닌 ‘지식소설’이란 꼬리표가 붙어있다. 처음 들어보는 장르인 만큼 이 소설을 한 두마디로 설명하기에는 난감하지만 고등학생부터 입맛이 까다로운 고급독자까지 매력적인 독서경험을 안겨주는 역작임을 보증한다.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쓴다면 이 책은 ‘흥미진진한 소설의 형식으로 누 천년에 걸쳐 쌓아온 인류사상의 정수를 담은 지적 소설’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지적 여행을 인도하는 주인공은 인공두뇌학을 연구하는 과학자 아버지와 소설가인 어머니를 둔 열다섯살짜리 독일소년 ‘알도’다.

이번에 출간된 1부 이야기는 알도가 아버지가 근무하는 인도의 바이오닉스 연구소를 찾아갔다가 실종된 아버지를 찾으면서 다양한 지식을 알게되는 얼개를 취하고 있다. 유전자 조작술을 통해서 인도의 카스트 제도를 영속화시키려는 ‘태양의 사원’ 산자이 교주의 음모, 영생의 비밀이 적힌 ‘나칼의 서’를 평생 찾아헤맨 고문학 교수가 급기야 신비주의에 빠지는 과정, 알도의 아버지가 만든 바이오 인공두뇌 컴퓨터 레나가 논리의 궤변을 무찌르는 사이버 여전사로 활약하는 모습 등 흥미로운 이야기가 환상 추리 SF의 장르를 넘나들며 전개된다.

자체로도 높은 평가를 받을만한 소설적 재미는 이 책에서는 난해한 지식을 쉽게 전달하기위한 포장에 불과하다. 등장인물의 대화나 논쟁을 통해서 제목만 알고있던 철학서나 사회사상서가 담고 있는 지식의 정수를 고등학생 정도면 이해할 수 있는 평이한 언어로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지식’이란 ‘참됨 선함 아름다움 자유 평등 사랑 정의 희생 성스러움 같은 인류의 보편적 문제에 대한 바람직한 견해’를 뜻한다. 구체적으로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고대철학부터 칼 포퍼, 하버마스, 마투라나의 현대철학까지 망라했고, 원시종교부터 역사, 논리학, 최신 과학까지 아울렀다. 1부 상 하권에서만 참고한 원전이 수 십권에 달할만큼 방대해 ‘지식 종합선물세트’로 불러도 손색이 없다.

그리고 이런 지식들이 원전의 문구를 그대로 소설에 기워입힌 누더기가 아니라 이야기 흐름속에 자연스럽게 녹여낸 기술 역시 돋보인다. 예를 들어 알도가 목격한 인도의 하층계급의 실태를 “사회적 불평등의 기원은 토지에 담장을 치고 ‘이것이 내 것이다’라고 선언하면서 시작됐다”는 루소의 ‘인간불평등 기원론’으로 설명한다거나, 악당에게 납치된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불가능해보이는 도전을 감행하는 이유를 “인간의 가치는 할 수 있는 일을 하는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해야만 하는 일을 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다”는 칸트의 도덕론에서 끌어내는 식이다.

저자가 수 년간의 준비 끝에 이 책을 쓰게된 동기는 “고등학생들이 논술고사를 치루는데 단편적인 문제풀이보다 근본적인 대비를 할 수 있는 읽을거리를 주고 싶었다”는 것이었다. 나아가 각 분야의 지성인들이 남긴 다양한 사상이 쓸모없는 화석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 사회에 일어나는 많은 문제에 대한 해법을 제시하는 나침반이라는 생각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싶다는 것이었다.

이 책은 저자의 소박한 바람을 넘어서 ‘이성(과학)의 횡포에 맞서는 보편적 가치’라는 진지한 주제의식을 담은 문명비판서로 확장된다. 과학의 힘으로 사회를 개조하려는 악당에 맞서 싸워 이긴 알도가 마지막에 깨우친 것은 “우리에게 필요한 진리란 유전자 조작에 의한 사회개혁 같은 이성적, 과학적 수단이 아니라 자유나 평등 같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쫓아 인간적인 방법으로 성취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앞으로 알도가 환경 및 생명의 본질과 중요성(2부·10월 발간 예정), 사이버토피아와 경제지상주의의 위험(3부), 자유와 평등의 숭고한 목적과 정당한 수단의 갈등(4부), 마지막으로 감각적 물질문명과 대중문화의 폐해(5부·이상 내년 출간)를 어떻게 배워갈 것인지 벌써부터 흥미를 갖게 만든다.

<윤정훈기자>digana@donga.com

◆ 저자 김용규는

저자 김용규(49)씨는 동국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했다. 자동제어기술의 근본인 논리연산 시스템을 개발하겠다는 꿈을 갖고 1982년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프라이부르크대와 튀빙겐대에서 수학하고 박사논문을 준비하던 중 비극적인 사건을 맞았다.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해 몇년간 "지옥같았던 병원 생활"을 겪으면서 박사의 꿈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김씨는 90년대초 귀국했지만 박사학위가 없어 대학 교단에 설 수 없었다. 대신 부업으로 논술 지도교사를 대상으로 철학사상을 강의하거나, 신학을 공부하는 목사를 대상으로 중세철학도 가르쳤다.

논술교사 강의용으로 준비한 방대한 자료가 모본이 된 '알도 시리즈'는 사실 김씨와 동생 김성규씨와의 공동 창작품이다. 프랑스 몽펠리에 대학에서 불문학을 전공한 동생이 스토리를 구성하면 형이 거기 담을 지식을 정리하는 방식이다.

김씨는 딸에게 남겨줄 선물이라는 마음으로 3년간 칩거하며 생에 처음으로 시작한 책쓰기에 정성을 쏟았다. 당장에라도 여러 권의 책을 만들 수 있을만큼 방대한 원고를 써놓은 상태다. 가을에는 널리 소개된 영화를 통해 철학의 주요 개념을 설명한 '영화뷔페 철학카페'(가제)를 출간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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