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자유위원회 지음 김택환 옮김
186쪽 9000원 중앙M&B
허친스 위원회 (Hutchins commission) 보고서를 처음 읽은 건 1989년 가을이었다. 130여쪽 밖에 안되는 분량에 글씨도 크게 제작돼 매일 두꺼운 원서를 소화해야 하는 부담에 허덕이던 학생시절에 잠시 숨을 돌리게 해준 기억이 새롭다.
그렇게 일주일 읽을 거리로 지나갈 줄 알았던 이 책과의 인연은 그러나 생각보다 훨씬 길게 이어졌다. 논문에 인용한 사례가 10여차례가 넘고, 강의에서는 거의 매학기 중요한 참고문헌으로 학생들에게 읽힐만큼 ‘자유롭고 책임있는 언론’은 학자와 선생으로서의 내 생활에 붙박이 동반자가 됐다.
이 보고서의 가장 큰 장점은 이론에만 치우치거나 현실에 매몰되지 않고 양자를 균형있게 결합시켜 독자를 설득하는 접근 방식이다. ‘자유롭고 책임있는 언론’은 신문과 방송, 잡지 등 다양한 언론현상의 문제를 정부와 매체 소유주, 경영자, 시민 등 구체적인 행위주체들에 대한 분석을 토대로 매우 현실적으로 진단한다. 소유집중에 따른 여론 독점의 우려에서부터 시청률과 독자 확대를 위한 선정적 보도자세의 확산, 통제할 수 없을 만큼 커지는 매체 소비자들의 압력 등도 중요한 해결과제로 제시한다.
이론적 측면에서 이 보고서는 1940년대까지 서방세계를 지배해온 자유주의적 언론이론을 대폭 수정할 만큼 커다란 철학적 전환점을 제공한다. 언론사와 언론인의 자유만 강조하던 과거의 패러다임을 수정해 오늘날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언론의 사회적 책임과 언론인의 윤리적 의무를 강력하게 요구할 수 있는 사상적 근거를 마련해준 문건도 이 보고서였다.
허친스 위원회 보고서를 우리말로 옮겨낸 일은 특히 언론개혁에 관한 논의가 과열된 상태로 진행되는 우리 나라의 상황을 고려하면 대단히 적절한 시기를 선택했다고 생각한다. 한국의 경우는 아니지만 번역자가 서문에서 말했듯이 언론과 국가의 관계나 언론 소유제도의 문제, 언론활동에 시민이 참여할 수 있는 역할과 매체간의 상호비평의 활성화 등 현재 우리 눈 앞에서 벌어지는 언론에 관한 거의 모든 쟁점들에 대한 참고자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현실에서 허친스 위원회 보고서를 주목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이 보고서가 철저하게 민간자율로 신망이 두터운 학자들의 독립적인 연구와 판단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정부가 개입할 공간이 없었음은 물론이고 5년이나 시간을 투입할 만큼 신중하고 철저했다는 점, 또 연구기간에 투입된 거의 30억원에 달하는 연구비를 정부예산이나 공적자금이 아닌 언론사인 ‘타임(Time)’지가 부담한 사례 등은 우리의 언론현실과 개혁 추진방식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이재경(이화여대 교수·언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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