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도 젊었을 적에 만났던 그런 분이 있었다. 연세대 신학대학장을 지내신 지동식 (池東植) 박사님이다. 어느 해 그분께서 노환으로 임종이 가까왔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서둘러 경기 고양 화전(花田)의 댁으로 그 분을 찾아뵈었다.
병석의 그 분(목사님)은 나에게 교회 잘 다니라고 유언하실 줄 알았더니 그런 말씀은 입밖에도 꺼내지 않으시고, “인간은 그릇에 넘치게 물을 담을 수 없다. 그러니 너는 훗날 그릇이 작아 물이 넘치는 것을 후회하지 않도록 젊은 날에 그릇을 크게 하도록 노력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그 말씀이 내게는 유언이 되었고, 나는 이제까지 그 말씀을 가슴에 새기며 산다.
공자(孔子)께서도 인물을 평가하는 일은 삼가셨지만, 역사가는 불가피하게 그런 악역을 할 수밖에 없는 때가 있다. 그러나 그들의 그릇이 얼마나 컸던지를 측정하기란 그다지 쉬운 일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권력이나 지위를 스스로 차지할 능력은 없지만 그것을 맡겨주면 능히 해낼 수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그만한 지위에 오를 수는 있지만 그것을 감당할 수가 없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혁명가-친일파 평가 극대극▼
높은 자리를 차지했지만 그것을 감당할 수 없었던 대표적 인물로 김옥균(1851∼1894)을 들 수 있다. 그에 대해서는 사람에 따라 좋고 싫어함이 판이하다.
그를 개화기의 뛰어난 인물로 보는 학자들이 있는가 하면 한낱 친일의 무리로 비하하는 시각도 적지 않다. 김옥균을 평가할 때 우리는 그의 이념이나 공적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그 그릇에 초점을 맞추는 것에서 훨씬 더 교훈적인 답을 얻을 수 있다.
그가 난세에 태어나 일세를 풍미했으니 영웅임에는 틀림없겠지만 과연 후대에게 긍정적인 교훈과 업적을 남겼는지에 대해서는 나는 부정적이다. 김옥균은 안동 김씨의 후예로 공주에서 태어났으나 강릉 부사와 형조참의를 지낸 김병기(金炳基)의 양자가 되어 강릉과 서울에서 자랐다. 그는 사람을 사귀는 데 능해 위로는 정승 판서로부터 아래로는 시정 잡배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사람들을 사귀었다.
좌의정을 지낸 박규수(朴珪壽)나 백의정승 유대치(劉大致)에게서 학문을 전수 받고, 영의정의 아들인 홍영식(洪英植)이나 철종의 부마 박영효(朴泳孝)와 교유(交遊)했다는 점이 그의 만남의 줄기를 이루고 있다.
김옥균은 일생에 네 번 일본을 방문해 개명 지식인인 게이오대학(慶應大學)의 창설자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를 만난 것이 인생 행로에 중요한 고비가 되었다.
김옥균은 세속적으로 말한다면 가무, 음주, 주색잡기에 능치 않음이 없었고, 서예는 망명지에서 생활비를 조달할 정도였으며, 바둑은 일본 바둑사에 기록될 정도였다. 혁명의 주역으로 갑신정변에 성공한 뒤에도 그는 스스로 이조참판에 머물렀다. 이는 그가 무욕(無慾)의 불심(佛心)에 달관했음을 뜻하는 것이니 실로 가상한 일이다.
▼日 다녀오며 개화사상 눈떠▼
그러나 경륜이라는 점에서 김옥균을 칭송하기가 어렵다. 스무 살 남짓한 대원 스물 몇 명으로 혁명을 성사하려 했던 무모함에 대한 비난을 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동지들은 투옥 당하고 멸문(滅門)의 화를 겪는데 자신은 일본으로 망명했다는 것은 삶과 죽음을 함께 하며 조국을 위해 싸우겠다던 동지로서의 의리가 아니었다.
그는 사흘 앞을 내다보지 못한 지각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결국 북태평양 고도(孤島) 오가사하라시마(小笠原島)와, 북해도의 삿포로(札榥)에 갇힌 몸이 되었다.
김옥균의 실수는 지나친 대일 의존책에 있었다. 그는 조국을 위해 신명을 바치자고 약속했던 민영익(閔泳翊)보다 일본 공사 다케조에 진이치로(竹慘進一郞)를 더 믿었다. 일본의 배신이 얼마나 처절했던지를 뼈저리게 느꼈을 때 그의 후회는 이미 늦었다. 진심이 어디에 있었던가를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의 그릇된 판단이 일본의 한국 침략에 이바지했다는 점은 틀림없다.
김옥균은 4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혁명이 실패하자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었던 망명지의 생활은 삶과 죽음 사이의 유희 같은 것이었다.
김옥균이 일본에 머물러 있는 동안 조선의 수구파는 자객 네 사람을 파견하였으니 장은규(張殷圭)·지운영(池運英)·이일직(李逸稙) 그리고 홍종우(洪種宇)가 바로 그들이다. 김옥균은 그들을 결코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들을 이용하려고 노력했다. 그들 중의 누구도 자기를 죽일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김옥균의 이와 같은 태도는 대담한 처사라고 평할 수도 있으나 달리 말하면 오만이었다. 그가 마치 죽음을 초월해서 살다간 사람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혁명이 실패하자 동지들과 함께 거취를 의논하던 자리에서 홍영식은 “왕의 위태로움을 두고 떠날 수 없다”고 말하고 왕을 지키다가 혁명의 제물이 되었지만, 김옥균은 “죽는 것은 어리석다”고 말하고 망명의 길에 올랐다.
▼신변 위험 느끼자 淸 도피▼
일본에서 더 이상 목숨을 부지할 수 없음을 안 김옥균은 청나라로 떠났다. 자기의 손에 맞아 죽은 수구파 대신 일곱 명이 모두 청의 하수인이었다는 점을 생각할 때 자신이 청나라로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김옥균은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에서의 위험은 피부에 와 닿았으므로 우선은 호랑이 굴을 벗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김옥균은 청나라의 북양대신(北洋大臣) 이홍장(李鴻章)이 자기에게 얼마나 절치부심하고 있는지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나에게 단 5분 동안만이라도 이홍장과 이야기할 시간이 주어진다면 운명은 나의 편이 될 것”이라고 호기를 부렸다. 그가 만일 이홍장을 만났다면 그의 꿈이 이루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이홍장을 만나기 전에 자객 홍종우에 의해 자신의 운명이 끝나리라는 사실을 미처 알지 못하고 있었다.
마침내 김옥균은 서른 세 살에 망명의 길을 떠난 날로부터 정확히 10년을 더 살 수 있었지만 그 기간 동안에 이뤄놓은 것은 없고 다만 욕스러움만 있었으니 그의 망명은 헛된 것이었다.
그는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동료 친지 혈육과 운명을 함께 했어야 했다. 서른 셋이면 그의 말처럼 죽기에는 어리석고 아까운 나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진실로 불세출의 영웅이었다면 그 세월이 그다지 짧은 것은 아니었다. 그리스도도, 알렉산더도, 그리고 이봉창(李奉昌)도 서른 세 살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들은 모두 할 일은 했다.
김옥균은 끝내 청나라 상하이의 여관방에서 홍종우에 의해 총을 맞는다. 주검은 조선으로 돌아와 강변에서 찢겼으며 문중에서는 그의 항렬인 균(均)자를 규(圭)자로 바꾸었다. 그는 마지막까지 차마 눈을 감지 못했다.
▼"재주 비상했으나 그릇 작아"▼
김옥균이 죽자 평소에 그를 아끼던 사람들이 그의 머리카락만으로 일본에 무덤을 세웠고 유길준(兪吉濬)은 ‘슬프다! 비상한 재주를 품고, 비상한 시대에 태어났으나, 비상한 공을 이루지도 못한 채, 비상한 죽음을 당했다’고 조문을 썼다.
김옥균은 비범했음에는 틀림없으나 결국 재승박덕(才勝薄德)한 사람이었다. 그는 그릇에 넘치게 물을 담으려 했다. 그것은 허욕이고 오만이었다. 이러한 실수는 한 사람의 불행으로 그치지 않고 우리 역사를 누란(累卵)의 위기로 몰아 넣었다. 김옥균은 우리의 자식들이 읽을 영웅전의 주인공은 결코 아니다.
신복룡(건국대 교수·정치외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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