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들뢰즈는 ‘천 개의 고원’에서 가장 중심적인 개념을 하나 들어달라는 질문에 ‘배치’라는 말로 답한 적이 있다. 욕망을 정치학의 중심 개념으로 떠올렸던 저서인 ‘안티 오이디푸스’와 이 책 사이에 있는 두 저자의 책 ‘카프카’는 “배치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끝난다.
이 ‘배치’란 개념을 통해서 혁명적 욕망과 억압적 욕망의 이분법에 갇혀 있던 욕망의 개념은 역사적 개념으로 변환된다. ‘천 개의 고원’은 다양한 욕망의 배치에 대한 풍요롭고 창발적인 분석을 통해 우리를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안내한다.
그런데 과연 배치란 무엇인가? 가령 벽-문-자물쇠라는 침실이란 공간을 특징짓는 ‘배치’를 보자. 어느 하나만 없어도 침실이 되지 못한다. 반면 배열 순서를 약간 바꾸면 그것은 감옥의 배치가 된다.
따라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자물쇠는 자물쇠다. 특정한 관계 속에서만 그것은 감금장치가 된다.” 비슷한 문장을 마르크스는 역사유물론의 요체를 설명하면서 제시한 바 있다. “흑인은 흑인이다. 특정한 관계 속에서만 그는 노예가 된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은 마르크스의 역사유물론과 같은 길을 가고 있다. ‘배치의 역사유물론.’
그렇지만 이 책에서 역사적인 방식으로 다루는 것들은 생산양식보다는 기호체제, 얼굴, 선분적 권력, 동물-되기, 전쟁기계, 포획장치 등이다. 즉 배치란 개념은 생산양식을 넘어서 세상의 모든 곳을 탐사하게 하는 ‘기계’가 되었고, 역사유물론은 그 모든 곳으로 넘쳐흐르게 된다. 새로운 사유를 생산하는 개념으로, 새로운 삶을 생산하는 기계로.
그래서 저자들은 책의 처음부터 명시적으로 요구한다. 이 책을 ‘기계’로 이용해달라고. 이 기계는 통념이나 상식, 혹은 관습이나 ‘정설’의 형태로 항상-이미 작용하는 역사와 철학, 문학과 과학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촉발하며, ‘척도’라는 형태로 행사되는 다수성(majority)의 권력에 맞서게 한다. 우리로 하여금 다시 혁명을 꿈꾸게 한다. 그러나 그 혁명에 피가 흐르지 않는다고 실망할 것은 없다. 니체 말대로 “좋은 전쟁에서는 화약냄새가 나지 않는 법”이니까.
확실히 이 책에서는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같은 열정은 느껴지지 않는다. 들뢰즈는 이 책을 한편의 철학적 음악이라고 주장한 바 있으며, 그래서 도대체 난해하다는 불평을 하는 사람들에게 오디오에 음반을 걸어놓고 듣듯이 읽어달라고 대답한 바 있다.
하긴, 모르는 음악도 자꾸 걸어놓고 듣다보면 ‘알게 되지’ 않던가. 더구나 여기서 펼쳐지는 게 ‘현대’철학임을 감안한다면, 그 난해함은 현대음악을 듣는 것에 비하면 훨씬 양반임이 분명할 테니까. 그들이 내는 새로운 소리에 조금이나마 익숙해지게 되면, 그래서 그들의 말소리를 그럭저럭 알아듣게 된다면, 새로운 감각과 사유, 새로운 삶 안에 들어가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기다리는 ‘도래할 민중’ 안에 있는 자신을.
이진경(연구공간 ‘너머’ 연구원·사회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