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여름 제1회 법의 지배를 위한 변호사대회에서 제5공화국이 남긴 법의 과제 라는 제목의 주제발표를 했던 필자로서는 변협의 이같은 현실 진단을 매우 착잡한 심정으로 대하지 않을 수 없다. 유신과 5공에서 실종된 자유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실질은 문민정부를 지나 국민의 정부 후반기에 이르기까지 12년이 흐르도록 아직 만족스럽게 채워지지 않았다는 인식 때문이다.
왜 자유민주주의여야 하는가? 그것은 개인과 기업의 자율과 창의성을 존중하고 자기발전과 자기보존의 가능성을 돕는 제도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민주주의 체제 하에서는 국가권력과 법률도 인간을 위해 봉사하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권력과 법률이 단지 통치의 지배도구가 될 때 자유민주주의는 질식당하고 만다.
또한 왜 법치주의여야 하는가? 그것은 인간의 타락한 본성에 기초한 권력현상의 일탈 가능성을 근거로 해서 권력의 자의적인 지배가 아니라 법과 정의의 지배여야 한다는 요청 때문이다. 권력이 정당한 목적의 한계 안에서 법적 절차에 따라 행사되도록 하는 것, 인권과 정의의 편에 서있는 법의 지배가 권력욕에 사로잡힌 사람의 지배의 우위에 있게 하는 것, 그것이 법치주의의 이념이다.
5공화국까지의 권위주의 통치는 헌법과 법의 지배를 명목상의 껍데기로 남겨둔 채, 적나라한 사람의 지배를 추구했던 기간이었다. 통치권이 그 한계를 알지 못했던 기간, 권력이 폭력으로 변질됐던 기간, 고문과 인권탄압 속에 전율과 공포가 의식을 짓눌렀던 기간, 정치가 법 위에 군림했던 기간이었다. 지금은 또 어떤가? 변협의 진단으로는 개혁이란 명분에 훼손된 법치주의, 특정인과 특정세력의 손에 휘둘리는 제왕적 통치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개혁은 분명 우리가 필요로 하는 시대정신이다. 그 요체는 과거의 권위주의를 극복하고 자유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실질적인 미래를 여는 데 있다. 그러므로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훼손하는 어떤 행태도 개혁이란 명분으로 정당화될 수는 없다. 개혁은 혁명보다 힘든 작업이라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개혁 깃발을 들고 거리를 누비며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외쳐대는 시민운동가들의 구호, 공영방송까지 합세하여 일사분란하게 펼치는 주요 언론사 매도, 정의를 앞세운 국세청의 먼지털이식 세무조사 등등, 최근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사태는 법치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의 눈에 우수를 자아내는 현상들이다.
죄진 사람에게도 인권은 있는 법이다. 그래서 '의심스러울 때는 시민의 자유에 유리하게' ,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에게 유리하게' , '의심스러울 때는 약자에게 유리하게' 라는 법언(法諺)들이 개인의 최대한의 자유를 담보해주고 있다. 확정판결은 고사하고 기소되지도 않은 사건을 놓고 이토록 권력과 사회 일각에서 공동전선을 펴고 벌이는 체계적인 매도행위는 법의 지배와 거리가 먼 사람의 지배구조 하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다.
아직 우리의 법치주의는 위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과도한 권력작용을 견제할 수 있는 비판세력마저 급격히 약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세무조사의 초점이 됐던 주요 언론사들의 논조는 행(行)에서 행간으로 눈 녹듯 잦아들기 시작했다. 일부 시민운동단체들의 정부 견제기능은 중심을 잃고 정체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혼미해졌다. 권위주의 우상 타파를 위해 깨어 있어야 할 종교인들조차 단술에 취해 있는 듯한 느낌이다. 권력 내부의 토론과 이성적인 자기성찰은 지역주의에 편향된 인맥의 결속력 때문에 기대하기 어렵다. 진실과 약자의 정의를 위해 말해야 할 지식인들의 양심적인 소리조차 점점 희귀해져 간다. 다들 미혹(迷惑)에 잠들어 있으면 장차 우리 사회는 어떻게 될까?
법치주의를 위기에서 구하는 길은 사법과 헌법재판소가 깨어 있어 얼마 만큼 양심의 소리를 발하느냐에 달려 있다. 법조의 모체라고 할 변협이 모처럼 법치주의의 위기에 대한 경종을 울린 것도 또 하나 희망을 갖게 하는 대목이다.
김일수(고려대 교수·법학, 본보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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