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입학했을 때 서울대 문리대 사학과에는 모두 6명의 교수가 재직하고 계셨다. 그 중 서양사 교수는 한 명뿐이었는데 그 한 분이 바로 민석홍 선생이었다.
선생이 담당한 서양 근대사 강의는 문리대의 명강의로 꼽히고 있었다. 차분하면서도 특유의 억양이 배어있는 선생의 말씨는 마치 시계로 맞추어 놓은 듯이 일정해 학생들이 받아쓰기에 안성맞춤이었다.
한 학기 동안 르네상스로부터 시작해 종교개혁과 절대주의를 거쳐 프랑스혁명에 이르는 선생의 강의는 유유히 흐르는 강물처럼 도도했다. 선생의 강의는 내용면에서 요령있고 체계적으로 잘 정리해주었다는 점에서 탁월했다.
주지하다시피 선생은 프랑스혁명사에서 우리나라 최고의 권위자다. 그러나 선생의 지속적인 학문적 관심은 프랑스혁명에 그치지 않고 서양 시민사회의 성립과 근대화에 있었다. 이것은 우리의 현실문제에 대한 선생의 관심과도 직결된다.
1960년대에 선생은 왕성한 학술활동을 통해 많은 발표를 했다. 유럽의 근대화, 시민사회혁명과 쿠데타, 민족주의 등이 선생이 주로 다룬 주제였다. 당시 학부생이었던 나는 발표장을 찾아다니며 선생의 학술발표와 강연을 열심히 들었다. 정치학자와 사회학자에 비해 언제나 알기쉽고 명쾌하게 말하는 선생의 발표는 사학자를 꿈꾸는 젊은 학도에게 무한한 긍지와 자부심을 심어주었고, 말과 글은 우선 분명해야된다는 인식을 갖게 했다.
베레모 쓰기를 즐기시고 파이프 담배를 애용하시는 선생은 평소에 깔끔한 인상을 주면서도 때로는 오연한 자세로 비칠 때가 있다.
이 때문에 선생은 가까이 하기가 어렵고 까다로우며 냉정하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그러나 사실은 까다로운 사람일수록 그 나름의 원칙과 규범이 있어 이를 깨뜨리지 않는 한 오히려 상대방을 자유롭고 편안하게 해주는 미덕이 있다.
선생이 바로 그러했다. 4년 동안 선생 밑에서 조교생활을 했지만 선생은 공식적인 업무 이외에는 일체 관여하지 않는 대범성을 지니고 있었다. 선생은 서양사학의 개척자로서, 그리고 많은 후진을 양성한 교육자로서 우리 사회와 학계에 기여한 바가 크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선생이 남기신 업적과 정신을 계승, 발전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세의 일은 현세인에게 맡기시고 선생의 영혼은 천상에서 고요한 평안을 영원토록 누리시기 두손 모아 빈다.
김영한(서강대 교수·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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