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창순의 대인관계 클리닉]"혹시 내가 잘못되면…"

  • 입력 2001년 7월 24일 18시 48분


30대 중반의 김모씨. 남편에 대한 싫은 감정, 미움 등으로 늘 마음이 편치 않다. 남편은 아침에 눈뜨면서부터 잔소리를 입에 달고 사는 타입이다.

집안이 왜 이리 지저분하냐, 그릇에 얼룩 묻은 게 안보이느냐, 우유팩은 꼭 씻어서 말려라, 야채와 과일은 농약이 묻었을지도 모르니 흐르는 물에 최소한 몇번 이상 씻어라, 너무 잘 익은 과일은 분명 방부제를 넣은 것이니 잘 보고 사오라 등등, 그의 잔소리는 종횡무진 끝이 없다.

그래도 그가 자기 몸에 대해 보이는 애착보다는 잔소리가 견디기에 낫다. 그는 수돗물은 믿을 수 없다면서 양치질도 꼭 비싼 생수로 한다. 양치컵도 따로 있어서 심지어 아이들도 건드리지 못한다. 조금이라도 아프면 난리가 난다. 이병원 저 병원 다니면서 이 검사 저 검사 다하고, 아무리 아무 이상이 없다고 해도 그럴 리가 없다며 가족들을 힘들게 한다.

연애시절, 그는 자상한 남자의 표본이었다. 꼭 집에까지 바래다 주고, 어쩌다 그렇지 못한 날은 무사히 잘 들어갔느냐고 전화해 주고, 매사에 자기보다 더 잔걱정을 하며 신경써주고, 그런 남자친구를 둔 자신을 친구들은 얼마나 부러워했던가. 그러나 지금 그녀는 연애시절 그가 보인 행동은 자상함 때문이 아니라 지나치게 걱정많고 소심한 탓이었음을 안다. 그리고 털털하고 대범한 친구 남편들이 부러울 뿐이다.

남편에게도 나름대로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식구 많은 집안의 장손이었다. 덕분에 어릴 때부터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남자로서의 책임을 교육받으며 자라났다. 지금도 그가 돌보고 책임져야 할 가족들은 많았다. 만일 자기가 아플 때, 그 가족들이 겪을 경제적 사회적 어려움을 생각하면 언제나 아찔한 기분이 들곤 했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자기 건강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는 또 우리가 얼마나 무방비로 위험에 노출된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를 강조했다. 교통사고율 세계 1위를 자랑하는 걸로도 모자라 서울 한복판에서 어이없게도 감전사로 사람이 죽는 나라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건강을 자기가 챙기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는 분명 어느 정도 노이로제 상태였다. 그러나 그의 얘기를 들어보면 또 아주 이해가 안가는 것도 아니었다. 그의 사회적 불안은 사실 우리 모두의 불안이기도 하지 않던가. 상담 끝에 그는 자기 노이로제 때문에 아내와 가족을 괴롭히지 않는데 어느 정도 성공했다. 그러나 사회적 불신과 불안감에 대해서는 글쎄…, 나로서도 뾰족하게 해줄 말이 없었다고 한다면 너무 무책임한 것이 되나?

양창순(신경정신과 전문의)www.mind-ope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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