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여자도 아니었고 글래머는 더더욱 아니었다. 친숙한 얼굴도 아니었고, 생기있는 얼굴도 아니었다. 당연히 오드리헵번도 아니었고, 클라우디아 시퍼도 아니었다.
그녀는 이미 18년전에 세상을 떠난,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미소로 절망 속에서 헤매이는 듯한 표정으로 살다간 오스트리아 출신의 여배우였다. 그녀는 애바 가드너처럼 멀리 느껴지지도 않았고, 마릴린 먼로처럼 욕정을 불러일으키지도 않았지만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우아함으로 환히 웃는 얼굴과 추한 얼굴을 동시에 보이면서 희망이 없어져 가는 유럽을 상징했던 거울이었다. 유럽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대표해줄 얼굴을 선택했던 것이다.
우리에게 얼굴은 인생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사람의 삶이 녹아 있고 희망이 어려있으며 절망이 배어있는 곳이 바로 얼굴이기때문이다. 어느날 콧노래를 부르면서 출근을 했는데 상급자가 얼굴을 심히 찡그리고 있었던 날 당신의 하루는 어땠는가? 감히 콧노래를 계속할 용기가 나던가?
최근 발간된 '얼굴의 역사'(니콜 아브릴 지음, 강주헌 옮김)는 바로 이런 점을 역사적으로 문화적으로 그리고 문학적으로 집요하게 추적한 책이다. '역사는 언제나 얼굴에 집착했지만 그 역사를 서술한 책은 지금까지 없었다'는 이 책의 카피처럼 저자인 니콜 아브릴은 이마, 눈, 코, 입술, 귀로 빚어진 세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얼굴로 인해 빚어진 인류의 역사를 더듬어 낸다.
얼굴은 인간의 형상 중에서 가장 연약한 부분이고 겉으로 드러나는 부분이며 가장 숨김이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얼굴과 더불어 사는 방법을 깨우친다. 철이 들면 얼굴을 다스리는 법도 알게 되고 타인의 얼굴을 감상하는 법도 알게 된다. 어떤 얼굴 앞에서는 넋을 잃지만, 어떤 얼굴 앞에선 고개를 돌려버린다.
그래서 얼굴은 가장 인간적이라 할 수 있다.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인 엠마누엘 레비나스가 타인의 얼굴을 그의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소재로 삼았던 이유는 타인에게서 배워야 할 것이 바로 얼굴이라는 신념 때문이었다. 어디 레비나스뿐이었는가?
에이젠슈테인의 영화 '전함 포템킨'에서 유모차를 끌던 유모는 피가 철철 흘러내리는 얼굴로 우리를 맞이했다. 그 얼굴을 클로즈업 했던 장면을 보았는가? 탄환이 그녀의 오른쪽 눈을 파고들었던 그 장면을... . 프란시스 베이컨은 이 얼굴을 보고 화가가 되었다.
저자는 이렇게 고대 이집트 시대에 그려진 그림에서부터 현대의 성형수술에 이르기까지 역사와 문화가 인간의 얼굴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조목조목 가려내고 있다. 특히 최근 들어 얼굴에 대한 편견이 얼마나 인간관계에서 악영향을 끼치고 성형수술의 해악이 또 얼마나 되는지를 진지하게 경고하고 있다. 스스로 쌓은 인간성을 얼굴로 표현하기 보다 TV나 스크린 또는 사진에 나타나는 스타의 얼굴을 닮으려는 (성형수술한) 인조얼굴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나르시스의 신화가 거울의 위험성을 예고했다면 저자는 스타 동일화의 위험성을 예언하고 있는 것 같다. 책을 읽다보면 역사상의 위대한 인물이나 성공한 인물에 대해 할리우드가 제시하는 잘 생긴 얼굴이 결코 우리 사회에 이롭지 않다는 것도 덤으로 얻을 수 있다. (생각해보자! 역사상의 위인들이 다 잘 생긴 사람이었단 말인가? 하나도 빠짐없이?)
소설처럼 사색이 있고 상징이 있으며 인문학과 문학이 하나로 어우러진 새로운 장르의 책이다. 얼굴에 담겨진 미스터리를 알고 싶다면 권할만 하다. 315쪽 9,800원
서광원<동아닷컴 기자>arase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