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찬의 문화비평]조선시대 '禮'와 현대사회 '언론'

  • 입력 2001년 7월 31일 20시 11분


1659년 효종이 죽자 인조의 계비(繼妃)인 자의대비(慈懿大妃) 조씨의 상복을 두고 논란이 벌어졌다. 이른바 기해예송(己亥禮訟)이다. 효종이 인조의 둘째 아들로서 왕위에 올랐다는 사실을 고려해서 조씨가 1년간 상복을 입어야 한다는 서인의 주장과, 맏아들이 아니라도 왕실의 종통(宗統)을 이었으면 당연히 적자(嫡子)로 인정된 것이므로 3년복을 입어야 한다는 남인의 주장이 맞섰다. 논쟁은 전국 유생들 사이로 확산됐고, 결과는 송시열과 송준길을 중심으로 당시 정권과 사림을 장악하고 있던 서인이 승리했다.

◆ 사회적 척도서 권력다툼 도구로

15년 후인 1674년, 효종비인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죽자 당시까지 살아있던 대왕대비 조씨의 상복을 두고 다시 논란이 벌어졌다. 이른바 갑인예송(甲寅禮訟). 인선왕후에 대한 조씨의 상복을 장자부(長子婦·맏며느리)에 대한 상복으로 할 것인가, 중자부(衆子婦)에 대한 상복으로 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이는 곧 효종을 장자로 볼 것인가, 중자로 볼 것인가와 직결되고, 다시 현종의 정통성과도 연결됐다. 즉위 15년째로 어느 정도 왕권을 장악한 현종은 서인을 견제하며 ‘중자가 왕위를 계승하면 장자가 된다’는 논리를 관철했다.

유교적 이상국가를 추구했던 조선에서 우주 자연의 이치가 세상에 조목조목 드러난 것(天理之節文)이라는 ‘예(禮)’는 곧 현실을 제어하는 규범이었다. 성리학의 이론은 예를 통해서 현실에 드러났고, 예가 이상과 명분으로 존재함으로써 현실은 일정한 한도 내에서 자체적 규제력과 정화력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때로는 이상과 명분이 현실을 제어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권력이 자신의 세력 확보를 위해 이상과 명분을 이용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 거친 싸움하더라도 '線'지켜야

기해예송과 갑인예송은 그 발단이야 어찌됐든, 결과적으로 예를 정치적 싸움의 도구로 이용한 것이었다. 기해예송을 통해 서인은 남인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았고, 갑인예송을 통해 현종은 서인을 몰아내고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했다. 이것은 곧 조선시대 사회의 척도이자 이상과 명분이었던 예의 순수성과 그 신성불가침의 권위를 손상하는 것이었다. 당시 승리자는 잠시의 권력을 잡을 수 있었지만 조선이라는 국가를 지탱해 주던 사회적 척도는 치명상을 입었다.

그 후 예는 이상과 명분과 척도의 기능이 점점 더 약화돼 당쟁과 옥사의 빌미로 이용될 뿐이었다. 그리고 19세기 세도정치기에 이르러서는 노골적인 권력다툼만 난무했고, 곧 조선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아무리 거친 싸움을 해도 넘어서는 안 될 선이 있다. 예치(禮治)를 표방하는 유교국가에서 그것이 예(禮)였다면,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조세권, 법치국가에서는 법,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언론과 사상의 자유다. 이런 이상과 명분과 척도의 순수성과 그 권위가 훼손돼 갈 때, 자본주의도 법치주의도 민주주의도 설 자리가 없다.

식자들의 논쟁이 시끄러운 세상, 진정 이 사회가 마지막까지 지켜내야 할 척도에 대한 근본적 논의가 있어야겠다.

<김형찬>khc@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