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강내희/책읽기를 방해하는 사회

  • 입력 2001년 8월 1일 18시 27분


한국인이 책을 별로 읽지 않는다는 사실은 큰 비밀이 아니지만, 한국 사회가 책을 읽지 못하게 한다는 점에 주목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 같다. 믿기 어렵겠지만 우리 사회는 책을 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책 읽기를 구조적으로 금지하고 있는 사회이다.

최근 대학생들의 독서 실태를 알려주는 한 조사 결과가 나왔다. ‘교수신문’이 올 상반기 몇몇 대학의 도서 대출 상황을 알아봤더니 학생들이 즐겨 찾는 책들은 주로 판타지, 무협, 대중 소설이더라는 것이다. 동네 도서 대여점도 아닌 대학 도서관에 판타지 소설 따위를 대량으로 들여놓은 사서들의 식견만큼이나 학생들의 ‘얄팍한’ 독서 취향에 실망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이번에 확인되었다는 것뿐이지 이런 결과는 전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요즘 학생들은 정말 책을 읽지 않는다. 읽는다 해도 쉽고 가벼운 소일거리만 찾을 뿐이다. 영화,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인터넷, 휴대전화 등 비문자 매체가 넘쳐흐르는 새로운 문화 환경 속에서 책 읽기는 이제 희귀한 구닥다리 여가 활용 방식으로 전락했다.

한때 젊은 사람들이 구속을 무릅쓰고까지 책을 구해 읽던 시절이 있었다. 당국이 만든 금서 목록도 대학생들의 독서 열기를 막아내지 못했다. 그 때 출판계는 덕분에 ‘좌파 상업주의’란 별난 특수를 누리기도 했고, 대학 주변에 앞다투어 인문사회과학 서점들이 들어섰다. 386세대 열혈 독자들이 모래시계처럼 하강운동하여 사라진 것일까. 지금 대학가엔 서점은 간 데 없고 커피숍, 패스트푸드점, 노래방, PC방 등만 현란할 뿐이다.

변화하는 문명의 견지에서 본다면 읽기 행위가 반드시 책에 국한될 필요는 없다. 시각, 청각, 복합 매체로 된 다른 텍스트도 당연히 대접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책을 외면하는 요즘 상황이 바람직하지는 않을 것이다. 책은 인간이 만들어 낸 가장 소중한 지적 도구의 하나이며, 책 읽기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런 책 읽기를 외면하는 요즘 학생들은 공부와는 담을 쌓은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최근의 세태는 독서 외면이 공부 외면으로 이어지지 않음을 보여준다. 책 읽기 문화가 거의 사라진 요즘에도 대학 도서관은 공부하는 학생들로 넘쳐난다. 공부와 독서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증거이다. 대학생에게만 국한되는 현상이 아니다. 한국에서는 문학, 철학, 사회과학 관련 책을 찾아 읽는 고등학생을 보기 힘드니 아예 책과는 거리가 멀거나 혹시 관심이 있어도 ‘공부나 열심히 하라’는 훈계를 받기 때문일 것이다.

책 읽기에 열중하기엔 오늘날 젊은이들은 너무 큰 삶의 짐을 지고 있다. 그들이 정열을 바쳐 할 일은 언제부터인가 입학, 취직, 고시 합격 등 경쟁 행위에 국한되어 버렸다. 다른 삶의 꿈을 꿀 길은 체계적으로 봉쇄돼 있다. 우울한 진단이지만 지금 젊은 세대에는 희망과 전망이 별로 없다. 입시의 좁은 문을 벗어나 숨차게 달려오면 더 좁은 취직의 문이 또 앞을 가로막고 나선다. 그러고 나서도 미래는 어둡다. 신자유주의의 높은 파도와 함께 빈부격차는 커져만 가고 실업률, 비정규직 비율도 높아만 간다. 대학생이라고 해서 이런 상황을 외면할 수 있겠는가. 금년 대졸자 취업 실패만 하더라도 40%를 상회하는데….

삶의 전망이 불투명하면 여유를 갖기 힘들다. 생존을 위한 대응으로 대학생들은 지금 대체로 양분돼 있다. 어떻게든 취업을 하려고 도서관을 지키며 점수 올리기에 열중하는 쪽과 아예 포기하고 나앉거나 소비문화가 지배하는 거리로만 나도는 쪽으로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삶과 세계에 대해 깊이 있는 통찰을 제공하지만 골치도 아프게 만드는 심각한 책을 읽는 문화가 학생들 사이에서 발전하기는 어렵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지면에서 화면으로, 문자 텍스트에서 이미지나 영상 텍스트로의 전환으로 나타나는 기술상의 변화가 독서 문화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분명하다. ‘신세대’나 ‘N세대’의 출현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더 큰 책임은 책을 읽을 여유와 전망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우리 사회에 있지 않은가 싶다. 최근의 열악한 독서문화는 사회구조적 현상인 것이다.

강내희(중앙대교수·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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