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 ‘구텐베르크 은하계’(커뮤니케이션북스·2001년) 역시 고전에 속한다. 1962년에 출간되었으니, 이번 번역본과의 시차는 상당히 큰 셈이다. 우리 지식사회에서의 높은 인용 빈도나 인지도를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이 책은 ‘미디어의 이해’와 더불어 맥루한의 커뮤니케이션 사상을 대표한다.
저자는 바로 이 책에서 ‘지구촌’이란 개념을 처음 창안했으며 1990년대 들어서는 ‘사이버스페이스의 예언자’로서 재평가되고 있다. 세계적인 전자잡지 ‘와이어드’가 그를 ‘수호천사’로 삼고 있지 않은가.
그에 따르면 세 가지 기술혁신이 인류 문명사를 크게 바꾸어놓았다. 첫째는 알파벳 문자의 발명, 둘째는 구텐베르크의 활판 인쇄술 발명, 셋째는 1844년 마르코니에 의한 전신의 발명이다. 이 세 가지는 그 순서에 따라서, 인간의 문화공간이 최초의 청각공간에서 시각공간으로 바뀌고, 시각공간이 증폭 확장되다가, 다시 시각공간에서 청각공간으로 반전되는 기제가 된다.
이러한 줄거리를 이해하는 핵심 관건은 다음 진술이다. “표음문자인 알파벳과 인쇄술은 인간을 귀라는 마법의 세계에서 중립적인 시각의 세계로 옮겨놓았다”는 것. 알파벳 이전에 사람의 오관은 평형을 이루어 동시적으로 작동했고, 특히 귀는 360도 모든 방향에서 오는 소리에 열려 있었다. 그런데 인쇄술은 눈을 가장 중요한 위치에 올려놓았다.
모든 인식 질서를 시각적 양태에 맡겼으며 그로 말미암아 “두뇌와 심장, 예술과 과학, 시와 음악, 사고와 행동은 조각 났다”는 것. 인쇄문화의 인간은 ‘조각 난 인간’이라는 전언이다.
이 책은 500쪽 분량의 책이다. 이른바 ‘안 읽히는’ 고전인 탓도 있지만 정말 읽기 힘들었다. 그보다 실제 문제는 번역에 있다. 번역도 하나의 미디어라고 할 때, 과연 이 책은 맥루한의 사상을 커뮤니케이션하고 있는가. 나는 그렇지 못하다고 판단한다. 그런데 ‘교수신문’ 6월 11일자에서 한 언론학자는 “어려운 원문임에도 불구하고 번역이 매끄러운 점은 이 번역본이 자랑할 만한 미덕”이라고 평했다. 같은 책을 읽고 이렇게 다른 시각이 있다니! 참, 보는 눈은 다양한가 보다.
김성기(문화비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