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한 장면이 아니다. 4년 전 바로 오늘 KAL기가 괌에 추락했을 때의 ‘실제상황’이다. 첨단의 미국 응급구조시스템이 기계처럼 가동하면서 험준한 산중턱을 받고 추락한 항공기로부터 승객들이 구조된 것이다. 초등학교에서부터 심폐소생술을 가르치고 전 인구의 30% 이상인 8000만명에게 응급처치 의료교육을 실시할 만큼 인명구조에 국가가 관심을 쏟은 결과가 연출한 기적이다. 그것도 모자라 미국은 국내 어떤 오지에서도 신고 후 15분 이내에 환자를 병원까지 이송하는 체제를 마련중이다.
▷만일 같은 사고가 아프리카나 남미의 어느 나라, 아니 멀리 갈 필요 없이 우리나라에서 발생했다면 과연 어땠을까. 갓길까지 들어찬 차량들, 응급차의 경광등에도 무감각한 운전자들이 버티고 있는 한 ‘사고 공화국’이라는 이 나라에서 재난으로부터 살아 남으려면 천운을 잘 타고 나는 것이 우선이다. 통계적으로 보아도 명색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입 국가인 우리나라의 응급구조 수준은 드러내놓고 말하기 부끄러울 정도다.
▷전국의 119구급대원 4300여명 가운데 현장에서 응급조치를 할 수 있는 응급구조사 자격증을 가진 사람이 32%에 불과하다면 절반 이상의 구급차는 단순히 환자를 수송하는 차량에 지나지 않는다. 전문인력이 응급조치를 할 경우 불구자가 될 확률이 절반 이하로 떨어지고 척추손상도 60%까지 줄일 수 있다는 미국의 통계는 우리가 왜 대형사고 때마다 희생자와 불구자를 양산하는지를 가르쳐 준다. 유난히 물난리가 많았던 이 여름은 정부가 그동안 인명구조투자에 얼마나 인색했는지를 실증하는 계절이었다.
<이규민논설위원>kyumlee@donga.com
구독
구독
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