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이규민/후진적 응급구조체제

  • 입력 2001년 8월 5일 18시 41분


‘항공기의 이상비행을 감지한 관제당국이 응급구조대에 비상대기를 요청했다. 레이더에서 항공기가 사라진 것을 발견한 미군당국도 국방부를 통해 백악관에 사실을 보고한다. 해당지역의 모든 미군기지에 긴급 구조명령이 내려지자 헬기들이 밤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항공기가 추락한 산중턱은 삽시간에 조명으로 대낮같이 밝아졌고 살아남은 승객들은 숙련된 구조요원에 의해 속속 구조됐다. 불과 한시간 만에 현장에 세워진 이동병원은 응급 소생치료로 32명의 소중한 생명을 되살렸다.’

▷영화의 한 장면이 아니다. 4년 전 바로 오늘 KAL기가 괌에 추락했을 때의 ‘실제상황’이다. 첨단의 미국 응급구조시스템이 기계처럼 가동하면서 험준한 산중턱을 받고 추락한 항공기로부터 승객들이 구조된 것이다. 초등학교에서부터 심폐소생술을 가르치고 전 인구의 30% 이상인 8000만명에게 응급처치 의료교육을 실시할 만큼 인명구조에 국가가 관심을 쏟은 결과가 연출한 기적이다. 그것도 모자라 미국은 국내 어떤 오지에서도 신고 후 15분 이내에 환자를 병원까지 이송하는 체제를 마련중이다.

▷만일 같은 사고가 아프리카나 남미의 어느 나라, 아니 멀리 갈 필요 없이 우리나라에서 발생했다면 과연 어땠을까. 갓길까지 들어찬 차량들, 응급차의 경광등에도 무감각한 운전자들이 버티고 있는 한 ‘사고 공화국’이라는 이 나라에서 재난으로부터 살아 남으려면 천운을 잘 타고 나는 것이 우선이다. 통계적으로 보아도 명색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입 국가인 우리나라의 응급구조 수준은 드러내놓고 말하기 부끄러울 정도다.

▷전국의 119구급대원 4300여명 가운데 현장에서 응급조치를 할 수 있는 응급구조사 자격증을 가진 사람이 32%에 불과하다면 절반 이상의 구급차는 단순히 환자를 수송하는 차량에 지나지 않는다. 전문인력이 응급조치를 할 경우 불구자가 될 확률이 절반 이하로 떨어지고 척추손상도 60%까지 줄일 수 있다는 미국의 통계는 우리가 왜 대형사고 때마다 희생자와 불구자를 양산하는지를 가르쳐 준다. 유난히 물난리가 많았던 이 여름은 정부가 그동안 인명구조투자에 얼마나 인색했는지를 실증하는 계절이었다.

<이규민논설위원>kyum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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