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부는 자유주의란 철학적 배경을 전제로 하고 ‘세계의 경제표준’을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자유주의가 정부 역할과 연결될 때는 ‘불필요한 정부개입을 줄이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래야 민간의 창의성이 살아나고 기업가정신이 활짝 꽃필 것이다.
공권력이 민간보다 우세한 ‘닫힌 사회’에서는 정부는 흔히 자신만이 정의를 실현하는 주체라고 착각한다. 민간이 하는 일엔 협잡(挾雜)이 개입할 우려가 크므로 국가기관이 나서야 공신력이 생긴다는 논리다. 세무조사를 벌일 땐 언제나 ‘조세 정의’라는 명분을 내세운다. 그러나 집권세력이나 공직자가 민간인보다 도덕적으로나 효율성 측면에서 더 낫다는 명백한 증거를 본 적이 없다.
최근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지는 “한국이 외환위기 이후 지난 2년간 이뤄낸 것으로 평가받고 있는 경제회복은 ‘거짓 여명(false dawn)’으로 판명될지도 모른다”고 보도했다. 개혁을 추진하면서 회생가능성이 불분명한 기업에 공적자금을 쏟아 붓는 등 원칙과 신속성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FT의 시각이 꼭 맞는다고는 할 수 없으리라. 그러나 국제사회에서 영향력이 강한 그들의 눈에 비친 한국경제의 현 상황은 이렇듯 ‘시장(market)’원리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고 있다. 시장은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에 의해 움직여야 하는데 한국에서는 ‘관계당국의 손’에 따라 여전히 좌지우지된다고 보는 것이다.
기업 구조조정이 시장원리대로 이뤄지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정부가 권한을 움켜쥐고 있는 데다 지나친 정치논리가 개입된 탓이 아닌가. 대북사업 협조기업이어서, 종업원이 너무 많아서, 지역경제에 큰 타격을 주므로…. 이런저런 이유를 내세우다 보니 외국인들은 한국정부가 시장경제 원리를 실천할 의지가 있는지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
기업들이 바라던 저금리시대가 실현됐지만 분위기는 시큰둥하다. 이자가 낮으면 은행돈을 빌려 시설투자에 나서는 것이 정상 아닌가. 그러나 외환위기 이후 기업들은 ‘부채비율 200% 지키기’라는 족쇄에 걸려 남의 돈으로 투자하는 일이 어렵게 됐다. 정부가 조성한 ‘차입경영은 죄악’이라는 도그마적 명분론, 책상물림 정책 탓에 정작 저금리시대에 꿈틀거려야 할 기업의 생동력이 시들해진 것이다. 금융기관도 쌓인 돈을 처치하지 못해 골치를 앓고 있다. 이자 불리는 재미에 푼돈을 모으는 근로소득자나 퇴직금 이자로 살아가는 중노년층도 울상이다. 몇 푼 되지 않는 이자를 받아봐야 물가가 오르면 헛일이기 때문이다.
미국 정부처럼 뚜렷한 철학을 바탕으로 미래를 내다보고 세계전략을 짜라는 등의 무리한 요구를 한국정부에 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관권개입을 줄이고 정치논리를 가급적 배제하라는 주문만은 확실히 전달하고자 한다. 개인의 자유와 창의성이 존중되는 ‘열린 사회’를 지향해야 할 이 마당에 한국에는 ‘그 적(敵)들’이 너무 많다.cheer@donga.com
구독
구독
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