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프리즘]송호근/자칭 대권후보들에게

  • 입력 2001년 8월 14일 18시 25분


한국의 정치에 대해서는 가능하면 말을 아끼려는 것이 평소 필자의 소신이었다. 얘기한들 허망함만 전해 받았던 지난 10년의 경험 때문인데, 인내의 한계를 넘는 이 일만은 한번 짚고 싶다. 자칭 대권후보들과 그들의 행보에 관하여.

지난 봄부터 솔솔 피어오른 대권후보론은 어느샌가 3당 합당론과 개헌론을 배경으로 본격적인 모양새를 갖추기 시작한 듯한 인상이다. 마치 출발신호가 지연되는 것을 탓하며 마구 몸을 풀고 있는 주자들을 연상시킨다.

그런데 퍼뜩 정신을 차려보면, 누가 그 선수를 출전시켰는지 출발선에서 요란한 몸짓을 해대는 그가 정말 선수인지가 의문시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아무도 결제해준 바 없는 ‘자칭’ 대권후보들인데, 벌써부터 수선을 떠는 모습이 영 미덥지도 않고, 수준 미달의 공방전에 허덕이는 요즘의 정국과 겹쳐 심란하기까지 하다.

권력승계의 문제는 국운을 좌우하는 중대한 사안이다. 봉건시대라면 장자승계의 원칙에 충실하면 되지만, 민주주의 시대에는 무엇에 기댈 것인가? 특히 한국과 같이 정당운영의 방식이 민의(民意)와는 절연된 경우 권력승계는 당 총재와 당내정치에 의하여 결정된다는 것이 문제이다. 그래서 전심(全心), 노심(盧心), 김심(金心)이 있었고, 다시 DJ의 의중을 헤아리기 위해 온갖 말과 프로포즈가 난무하는 중이다. 당의 내부인사라면 대체적인 기류를 읽어내겠지만, 외부인들은 혹시 저 사람이 은밀하게 교지(敎旨)를 받은 것일까 하는 억측만 할 뿐이다.

나는 묻고 싶다. 당신들은 어디에 있었는가. 광복 후 최대 위기를 돌파하려고 온 국민이 지혜를 짜내던 지난 3년 반 동안 당신들은 어디에 있었는가? 실업자가 쏟아져 나올 때 일자리를 만들 방안을 짜내 본 적이 있는가? 파업노동자와 직접 머리 맞대고 해결을 모색해 본 적이 있는가? 의료대란을 진정시키려 뛰어다녀 본 일이 있는가? 공적자금 150조원이 투여된 기업현장에서 무엇이 문제인지를 분석해본 적이 있는가? 한국의 정당정치가 무엇이 문제이기에 후보군들이 벌써 들떠 성화인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그것이 정당성을 갖추고 있는지 점검해본 적이 있는가? 흔히 지적하듯이, 당신의 정치적 능력을 검증받은 적이 있는가? 관료사회를 장악하고 군과 경찰을 통솔할 능력, 노동자와 기업인에게 다시 의욕을 불어넣을 정책적 혜안, 그리고 무엇보다도, 훨씬 피폐해진 한국사회를 이끌어갈 남다른 비전이 있는가? 당신들은 그동안 무엇을 했기에 대선후보로 자처하고 나서는가? 적어도 필자는 그들을 집권여당 대선후보로 결제해 준 적도, 마음속으로 수용한 적도 없다.

따지고 보면, 이런 후진적 현상의 책임을 후보 개인에게 미루는 것이 불공평하기는 하다. 한국의 정당구조가 그렇게 만들기 때문인데, 대선과 같은 중대한 정치 일정이 당 총재에게 일임되어 있고, 정작 후보를 가려내는 여과장치가 당원들의 투표에만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20세기 미국에서 양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된 사람들은 모두 오랜 공직경험을 갖고 있다. 대통령 후보로 나서려면 예비선거와 본선거라는 두 가지 난관을 돌파해야 하는데, 정당 후보를 뽑는 예비선거(primary)에도 유권자들이 직접 참여한다. 당원끼리 알아서 하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내각제인 영국에서 당수가 되는 과정은 그야말로 정책능력과 지도력 검증의 험난한 길이다. 신노동당을 이끄는 토니 블레어는 이미 하원의원 시절부터 경제, 고용, 노사관계 등의 분야에서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았다. 오죽하면 1993년 노동당 당수가 갑자기 사망했을 때 절대적 지분을 장악했던 중진들이 43세의 정치신인 블레어에게 당수자리를 제의했겠는가? 인품과 능력이 출중하기로 소문난 경쟁자 고든 브라운도 블레어를 밀었다.

신생 민주국가 한국을 원로격인 미국과 영국에 견준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지만, 그래도 대통령이 되려고 나선 사람이라면 출마의 정당성을 가름할 기준과 원칙이 필요하다. 그래야 관전의 즐거움도 정당하게 맛볼 것 아닌가? ‘알아 달라고’ 외치는 사람이 아니라 국민이 스스로 ‘알아 주는’ 사람이 어딘가 있다면 나는 서슴없이 그 사람을 진정한 후보로 생각할 것이다.

송호근(서울대 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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