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여년 전 명나라 신종은 조선이 임진왜란에서 승리한 것은 촉나라의 명장 관우(關羽)의 영혼이 도와준 덕분이니 관우의 사당을 건립해 그 공을 길이길이 숭배하라는 칙령을 내렸다. 당시 조선 국왕이었던 선조는 서울 숭인동 약 3000평의 대지에 100평 정도의 웅장한 건물을 1602년 완공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 후암동에 남관왕묘(南關王廟)를 건립하고 해마다 봄, 가을 두 차례 시향을 지냈는데 임금이 참석할 때에 친히 재배까지 하는 제례였다.
그러면 관우는 어떤 위인인가.
그는 서촉의 하동 출신 무장으로 유비를 도와 공을 세우며 명성을 날리다가 상대인 손권에게 모살된 사람이다. 이런 일개 외국의 군인에 불과한 관우를 정전(正殿)에 장엄한 갑옷 차림에 금빛으로 단장해 부처님같이 봉안하고 왼쪽에는 유비, 장비, 제갈량 그리고 오른쪽에는 조위, 관창, 옥보 등이 군비를 갖추고 서있게 하면서 ‘왕’이라는 호칭까지 붙여 ‘관왕묘’로 추대하였다. 말기에는 관우를 신으로 숭배하는 관성교(關聖敎)를 발족하여 삼성보고명성경(三聖寶誥明聖經)이라는 경전을 선포하여 혹세무민하는 종교 아닌 종교로 내려오면서 현재에도 제수를 차려 놓고 예를 표하고 있는 현실이다.
1592년 왜군이 침범해 오자 전쟁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던 조선 조정은 명나라에 수차례 구원을 간청했으며 이여송(李如松)이 군사 3만명을 이끌고 와서 조선군과 함께 왜군을 물리쳤다.
임진왜란이 끝나자 명나라 신종은 조선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200년 전 촉나라의 일개 장수의 사당을 건립하라 했는데,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요구였다.
선조는 임진왜란에서의 도움 때문에 부득이 그 요구에 응했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이러한 관왕묘 건립은 역사적 사리에도 맞지 않고 국가적 위신이나 민족적 자존심에서도 용인할 수 없으며 종교적 이론 역시 성립할 수 없다.
비슷한 목적으로 서울 서대문에 건립한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던 영조문(迎詔門)도 이미 100여년전 철거하여 독립문을 건립하였고,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던 모화관(慕華館)도 독립관으로 개칭했다. 그리고 일본의 퇴각 후에 경성신사, 내목신사, 이등신사 등도 모두 다 철거됐다. 그런데 왜 하찮은 외국의 일개 장수의 사당은 철거하지 않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임진왜란에서 큰공을 세워 민족을 구한 충무공 이순신, 도원수 권율을 비롯한 위대한 선조들의 사당 한 채 번듯이 못 세우고 있는 상황에서 엉뚱하게 외국 군인을 숭배하고 있는 전국 각지의 관왕묘(동관왕묘, 남관왕묘 등)는 하루속히 철거돼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조용구(배명중학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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