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황호택/'기록약한 나라'

  • 입력 2001년 8월 14일 18시 25분


조선시대에는 임금이 승하하면 실록청(實錄廳)이라는 기구가 만들어져 사초(史草)를 바탕으로 실록 편찬 작업을 했다. 유네스코에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록된 조선왕조실록은 태조부터 철종까지 25대 왕들의 통치사를 1893권 888책에 담은 방대한 기록물이다. 승정원일기는 조선초기의 것은 임진왜란 병자호란에 소실되고 인조 이후의 것만 남았는데도 분량이 조선왕조실록의 4배를 넘는다. 지금의 대통령 비서실에 해당하는 승정원에서 국왕의 일과와 지시, 각 부처의 보고 상소자료 등을 적어놓은 기록이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은 백악관을 떠날 당시 수t의 문서를 국립문서기록처(NARA)에 넘겨주었다. NARA는 이 문서를 분류하고 정리하는 ‘클린턴 대통령 자료 프로젝트’를 수행중이다. 일종의 실록청이다. NARA는 넘겨받은 것뿐만 아니라 대통령과 영부인이 이곳저곳에 보낸 개인 편지와 문서도 수집한다. 법에 따라 모든 대통령이 남긴 기록은 5년 동안 공개할 수 없다. NARA는 클린턴 퇴임 5년이 되는 2006년 1월 개관하는 클린턴 도서관에 이를 넘겨준다. 부시 대통령의 백악관에서 작성된 문서도 같은 절차를 밟게 된다.

▷세계에 자랑할만한 기록문화의 전통이 이어지지 않은 것은 식민지와 전쟁의 혼란을 거치며 기록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광복 후 독재정권들은 부당한 권력행사를 은폐하기 위해 ‘문서 보고 후 파기’를 원칙으로 하거나 ‘구두 보고의 기록’을 남겨두지 않았다. 통치사료 비서관을 두었던 전두환 대통령은 퇴임하면서 회의록은 물론 수석비서관들이 작성한 문서까지 연희동 사저로 옮겨놓았다는 보도도 있었다.

▷대통령과 비서실이 작성하는 문서와 기록은 그들 개인의 것이 아니라 국민의 재산이다. 대통령 관련 기록물의 보존을 의무화한 공공기관 기록물 관리 법률이 제정된 것은 불과 2년 전이다. 현 정부는 정권 교체 시기에 일부 부처의 기록 파기 소동을 겪고 나서 이 법을 만들었으나 스스로 잘 지키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공공기관의 문서와 기록은 행정 행위의 투명성 정당성을 보증하는 장치이며 후세를 위한 역사 기록이다.

<황호택논설위원>hthw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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