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가운데서도 언론학도인 필자의 마음을 울린 내용은 “자기 자신의 불완전함을 전제하고 자신의 생각과 주장을 내세우면서도 남의 생각과 주장이 들어설 자리를 비워두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의 마음가짐’으로 민주적 공론의 장을 만들자”고 촉구한 대목이다.
특히 이 대목은 민주사회에서 ‘언론의 자유’, 또는 더 포괄적인 의미인 ‘표현의 자유’가 필요한 까닭을 아주 잘 표상하고 있다. 표현의 자유가 필요한 까닭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상호보완적인 이론이 있다. 예컨대 ‘사상의 자유시장론’, ‘안전판 이론’, ‘자치론’, ‘우월적 균형론’, ‘접근 이론’ 등이 그것이다.
필자는 평소 각 이론의 대표적 주창자 가운데서도 표현의 자유가 필요한 까닭을 개인적 차원과 사회적 차원에서 동시에 잘 정리한 토머스 에머슨의 논지를 자주 인용한다. 그의 논지는 특히 ‘적과 동지의 이분법적 편가르기’를 통해 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을 타도의 대상으로 삼아 매도하는 최근 한국 지식인 사회의 풍토를 감안할 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본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표현의 자유는 ‘개인의 자기 성취를 보장하는 수단으로 필수적이다’. 둘째, 표현의 자유는 ‘진리를 발굴하고 지식을 발전시키는데 필수적인 과정이다’. 셋째, 표현의 자유는 ‘모든 사회 구성원으로 하여금 공공 문제에 관한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토록 하는데 필수적이다’. 넷째, 표현의 자유는 ‘필수적인 합의와 건강한 이견(異見) 사이의 유연한 균형을 유지하여 보다 융통성 있고, 그래서 보다 안정된 공동체를 이룩하는 한 방법이다’.
에머슨의 4가지 명제 가운데서도 사회적 차원의 필요성을 지적한 셋째와 넷째가 더 마음에 다가온다. 셋째 명제는 ‘자치론’을 다른 말로 표현한 것이다. 자치에 필수적인 공공 문제를 토론하는 과정에서의 표현의 자유는 다른 문제에 관한 표현의 자유보다 훨씬 더 강하게 보호돼야 한다고 역설한다. 대표적인 주창자인 마이클 존은 거의 절대적인 보호를 주장하기도 한다. 그만큼 공공 문제에 관한 의사결정은 공개적이고 이성적이며 자유로운 토론 과정을 거쳐 이루어져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민주적 공론의 장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거기에 참여하는 기회의 균등 못지 않게 토론 과정에서 사실과 논리를 바탕으로 자신의 이성을 설득력 있게 제시할 수 있는 지적 역량과 남의 공개적 이성을 받아들일 수 있는 ‘수용의 마음가짐’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자신과 의견이 다르다고 해서 인신공격을 일삼고 심지어 위협을 가한다면 자신의 부족함을 스스로 선전하는 일일뿐더러 토론을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런 점에서 필자는 에머슨의 넷째 명제를 높이 평가한다. 이 명제는 동양의 옛 성인이 말한 ‘화이부동’을 연상시킨다. 의견의 차이가 있어도 화목한 사회, 그리고 필요할 때에는 합의를 도출해낼 수 있는 역량을 가진 사회야말로 바로 건강하고 품격 있는 사회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의견이 다른 사람을 왜 그토록 적대시하게 되었는가? 흔히 하는 얘기로 민주 투쟁을 했다는 도덕적 우월감에서 비롯된 독선 때문인가, 아니면 그동안의 피해 의식 때문인가? 과연 지금 개혁을 부르짖는 인사들 가운데 ‘진정한 민주 투쟁’을 한 인사는 얼마나 되는가?
최근의 적대감은 투쟁 때문에 적절한 경륜을 쌓을 기회를 놓친 투사 및 그 주변 세력들의 열등감 내지 두려움과 이들의 검증되지 않은 역량을 낮추어 보면서도 이들의 공격을 달가워하지 않는 방관적 전문 지식인들의 도덕적 자괴감이 서로 방어적으로 표출된 데 따른 영향도 없지 않다고 본다. 이런 점에서 원로들이 “신뢰의 구축을 위하여 모두 지금까지의 실패와 잘못을 인정하고 새롭게 정직한 출발을 해야 한다”고 한 고언을 깊이 성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민웅(한양대 교수·언론학, 본보 객원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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