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가 심각한 갈등 상태에 있음은 분명하다. 상반된 가치와 욕구들이 곳곳에서 충돌하고 있다. 남북문제에서부터 경제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합의된 의견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평양 대축전에 간 사람들끼리도 다퉈 “북에 가서도 남-남 갈등이냐”는 자탄이 이어지고 있는 판이다.
이론적으로 갈등(conflict)은 크게 두 가지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다. 하나는 갈등을 일종의 병리적 현상으로 보는 것이다. 갈등은 비정상적이고 분열적이어서 사회의 안정을 해친다는 것이다. 미국의 사회학자 탈코트 파슨스를 비롯한 일단의 구조 기능주의자들이 이런 입장에 선다. 이들은 사회의 변동보다 유지에 더 관심을 두기 때문에 종종 보수적이라고 비판을 받기도 한다.
다른 하나의 관점은 갈등을 극히 정상적인 사회현상으로 보는 것이다. 어떤 사회, 어떤 체제에서도 갈등은 일어날 수밖에 없으며 갈등은 오히려 사회발전의 원동력이 된다는 것이다. 독일의 사회학자 랄프 다렌도프는 사회는 갈등이 있기에 발전한다고 믿었다.
‘국론 분열’과 ‘총체적 위기’로 표현되는 작금의 우리 사회의 갈등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발전을 위한 진통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긴 설명이 필요없다. 정치인들이 주고받는 욕설, 치졸한 사회주의 논쟁, 섣부른 대북 환상, 그리고 지역감정을 보면 우리의 갈등은 감정적이고 소모적일 뿐이다. 그렇다고 갈등을 과도하게 인식해 하루아침에 나라가 동강나는 것처럼 반응하는 것도 바람직스럽지 않지만.
진실로 심각한 문제는 갈등을 조정하고 해결하는 능력의 부재다. 갈등이 심화돼 폭력적인 수준으로 발전하기 전에 민주적 절차와 대화를 통해 이를 해소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런 사회체제적 역량이 있는 것 같지 않다.
갈등 해소에는 여러 가지 조건들이 필요하다. 이념적 동질성, 기본 가치의 공유(共有), 그리고 다원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나 역시 중요한 것은 대통령의 역할이다. 우리처럼 산업화를 어느 정도 달성한 국가일수록 더욱 그렇다. 이 점에서 미국 웨스트버지니아대학의 크리스토퍼 플레인 교수와 고려대 함성득(咸成得) 교수가 함께 쓴 ‘발전 이후-한국의 대통령직과 관료제의 변화’(97년)란 책은 매우 시사적이다.
두 사람은 “산업화를 이룬 한국의 경우 대통령은 과거 개발독재 시대처럼 매사를 지시하고 자원을 직접 사회 각 분야에 배분해 주는 대신 사회의 다양한 이해관계와 갈등을 조정해줌으로써 사회적 긴장을 풀어주는 중재자가 되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탈(脫)권위, 세계화, 지방화, 정보화 속에서 대통령은 ‘선의의 중재자’여야 한다는 것이다.
언론사 사주 구속으로 1막이 끝난 드라마 ‘올 여름의 개혁’에서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의 역할은 어떤 것이었을까. 법과 원칙의 장막 뒤에서 그는 중재자이기를 포기했던 것일까. 자신의 이상(理想)과 꿈을 몰라주는 관객들이 야속해 서운함만 마냥 삭이고 있었던 것일까.
<이재호 정치부장>leejae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