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김충식/의문의 죽음들

  • 입력 2001년 8월 21일 18시 40분


그곳에 이르면 머리를 숙이게 한다. 수건을 드리워 주위를 보지 못하게 한다. 남산 조사실로 끌려가는 사람은 차 속에서부터 주눅든다. 철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운동화 신은 청년들이 겨드랑이를 낀다. 계단을 오르내릴 땐 조그맣게 ‘하나 둘’ 구령을 붙인다. 앞을 가렸기 때문에 그렇게 해야 실족하지 않는다. 조사실 안은 야전침대와 책상 의자만 덩그러니 놓여 있다. 그 전등만 외로운 방에서 몇 날이 걸릴지 모를 사투(死鬪)가 시작된다.

▷그저 치고 매질하는 것은 고문도 아니다. 때로는 벌거벗기고 신고 온 구두를 입에 물려 한없이 세워 놓는다. 그런 짐승만도 못한 제 몰골을 돌아보며 정신적으로 인간이기를 포기하게 만든다. 단시간에 항복을 받아내서 수사 구도에 짜 맞추려는 것이다. 인간의 존엄이고 인권이고 그런 말은 한낱 장식품일 뿐이다. 이 문명의 도시 한복판, 명색이 법치국가의 조사실에 이런 부끄러운 가학 범죄를 업으로 삼는 공무원도 있었던 것이다.

▷73년 당시 서울대 법대 최종길 교수가 조사 받은 곳도 여기다. 그러다 중앙정보부 건물 7층에서 떨어져 숨진 채 발견되었다. 이 사건은 ‘간첩 자백 후 부끄러워 투신했다’(중정측) ‘강압 조사로 사망했다’(유족측)는 주장이 엇갈려 왔다. 이제 정부의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당시 수사 기록과 수사관 진술을 종합해 볼 때 간첩 자백은 전혀 없었다’고 발표했다. 중정이 사망을 덮고 수습하기 위해 내세우던 주장들이 뒤집힌 것이다.

▷고인은 이번 발표만으로도 반쯤 해원(解寃)을 한 셈이다. 건국 이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반정부 민주화 투쟁을 하다 반국가 빨갱이로 몰려 갇히고 더러 목숨까지 잃었던가. 그리고 누명을 벗은 이는 몇이나 될 것인가. 한없이 불행했던 최 교수는 사후나마 명예라도 돌려받는 것 같다. 이제 그 중정 터는 남산공원이 되고, 그때의 수사관은 지금 미국에 산다. 조사위는 그 수사관을 만나러 미국에 갔으나 최 교수 문제에 완강히 손을 내젓더란다. 권력에 상처 입고 몰락한 사람들의 쓰라림이 아릿하게 맺혀 온다.

<김충식논설위원>seeschem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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