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송영대/8·15평양축전이 준 교훈

  • 입력 2001년 8월 21일 18시 43분


1985년 8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적십자회담에 참가하기 위해 우리측 대표단이 평양에 도착했다. 북한은 우리측 대표단에 학생소년궁전을 관람시켜 주기로 한 당초의 약속을 갑자기 바꿔 모란봉 경기장으로 유인한 다음 10만명의 관중 앞에서 북한 체제 선전을 내용으로 하는 매스게임을 관람시켰다.

우리는 이번에 북한이 ‘8·15 민족통일 대축전’이라는 이름의 ‘굿판’을 평양에서 벌여놓고 우리측 방문단을 상대로 16년 전의 정치쇼를 재연하는 것을 보았다.

이번 평양사태는 우리로 하여금 몇 가지 본질적인 문제를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됐다. 첫째, 북한은 역시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북한은 남측 대표단에 평양시민 2만명이 기다리고 있다며 ‘조국 통일 3대 헌장 기념탑’에서의 축전 개막행사 참가를 부추겼고 마침내는 김일성 주석의 생가인 만경대까지 데려갔다. 남쪽 방문단 내부에 행사 참가에 대한 이견이 있음을 알고 있는 북한이 이처럼 기만술책을 벌인 것은 대남 통일전선전술에 입각한 분열책동이라고 할 수 있다.

북한이 입만 열면 ‘6·15선언’ 정신을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 같은 민간행사까지 대남공작과 통일전선전술에 이용하는 것은 정상회담 이후에도 북한이 달라진 것이 없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현재 북한의 대남자세는 남한 당국에 대한 비난 자제를 제외하고 여타 분야에서는 정상회담 이전 상태로 회귀한 느낌을 주고 있다.

둘째, 정부가 대북정책을 서두른 나머지 이번 사태를 불러왔다는 사실이다. 정부가 당초 북한의 악용을 우려하며 민간단체의 방북을 불허한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이번 사태는 사전에 충분히 예견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하루만에 방북 불허 입장을 바꾸고, 각서도 형식적으로 몇 사람한테서만 받고 방문단을 서둘러 보낸 배경은 무엇인가. 그것은 당국간 대화가 단절된 상황에서 민간단체의 교류마저 끊어지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답방이 어려워질 것이라고 판단, 그의 답방 여건을 조성하기 위한 조바심 때문이었다고 보인다.

셋째, 우리 사회 친북세력들의 이념적 일탈현상이 위험 수준에 이르렀다는 사실이다. 평양에서 돌출행동을 한 ‘통일연대’측은 이번 사태에 대해 ‘조국 통일 3대 헌장 기념탑’ 행사 참석은 문제될 것이 없고, 연방제 통일방안을 불온시해선 안되며, 국가보안법은 철폐돼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통일탑은 북한이 ‘고려연방제’ 통일방안을 기념하기 위해 제작한 상징물이고, 그 ‘고려연방제’는 대남적화를 위한 통일방안이다. 따라서 통일탑 행사 참가나 연방제 주장은 곧 북한 통일방안에 대한 동조를 의미하는 것이며, 특히 국가보안법 철폐는 바로 ‘고려연방제’ 주장에 들어 있는 주요 내용의 하나다.

더욱이 김 주석의 생가인 만경대 참관 방명록에 ‘만경대 정신 이어받아 통일위업 이룩하자’고 쓴 것은 김일성 주체사상에 의한 통일주장이 아니고 무엇인가. 또 ‘노동자 계급 앞장서 조국의 자주적 통일을 앞당기자’는 것은 프롤레타리아 중심의 사회주의 사회 건설을 표방하고 있는 북한의 논리가 아닌가. ‘역사의 자취를 목격했다’는 것은 김 주석의 혁명전통을 깨닫게 되었다는 말이 아닌가.

사실이 이러함에도 ‘통일연대’측이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기는커녕 온갖 사술로 자기 합리화에 급급한 태도를 보인 것은 자유민주주의의 이념이탈과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훼손하는 중대한 행위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이번 사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가. 정부는 퍼주기식의 대북지원을 하면서 번번이 북한에 이용만 당하고, 심지어 남한 내부의 갈등 현상까지 초래한 대북정책을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 안이한 대북 인식을 바탕으로 졸속으로 방북을 허용하고 김 위원장의 답방에 매달리는 식의 자세를 이제는 버려야 한다.

아울러 이번 사태에 대한 책임추궁이 실무 차원이 아니라 정부 고위층 차원에서 이뤄져야 할 것이다. 일부 방문단원들의 범법행위도 엄격히 가려 사법처리 등 응분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 그럼에도 정부가 북한을 자극해 김 위원장 답방에 영향을 줄 것을 우려하여 이번 사태를 유야 무야 넘긴다면 국민적 지지를 상실함은 물론 남북관계에 또 하나의 나쁜 선례를 남기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송 영 대(숙명여대 겸임교수·전 통일부 차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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