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이태준(1904∼?)은 1946년 8월10일 평양을 떠나 소련을 여행하고 10월17일에 돌아왔다. 조소(朝蘇)문화협회에서 주관한 것으로 된 여행단은 인솔자 격인 소련군 장성 등을 포함해서 27명이었고 농민 대표를 위시하여 각계 각층의 인물이 망라되어 있었다. 작가 이기영과 시인 이찬이 동행하였고 이태준의 ‘소련기행’은 1947년 5월에 간행되었다가 이번에 전집에 포함되어 다시 나왔다.
소련의 대외문화협회가 이들의 현지 여행을 기획, 안내하였고 일행은 모스크바, 레닌그라드, 스탈린그라드, 아르메이니 및 꾸루지아 공화국 등을 돌아보았다. 책은 일기체로 되어 있어 구경한 것과 소감이 소상하게 적혀있다. 크레물린궁, 지하철, 프라우다 사옥, 트랙터 공장, 레닌 묘, 아동극장, 오페라 극장, 학교, 꼬르키 박물관 등 예정된 코스를 다니며 구경한 것이 꼼꼼히 기술되어 있다.
미리 메모하고 준비한 탓이기도 하지만 세부 묘사가 놀랄 만큼 세세하다. 이태준은 작가의 자질로 ‘눈치’를 거론한 적이 있다. 그것을 ‘눈썰미’라 할 수도 있겠는데 이태준 자신이 그 점에서 탁월했다고 생각한다. 가령 트랙터 공장이나 격전지의 참상에 대한 묘사는 소상하고 치밀한데 이 점이 이 책보다 10년전에 나온 앙드레 지드의 ‘소련기행’과 다른 점이다. 후자는 구체적인 묘사보다 ‘획일주의’ ‘몰개성화’ 같은 일반론을 통해 자기의 소견을 전경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일본이나 조선의 좌익소설’이란 말도 쓰고 있다. 또 꾸르지아 영화촬영소에서 본 무궁화에 대하여 “이게 우리 국화”라고 소리칠 만치 화려하지 못했다고 적고 있다. 아직도 그의 본색이 남아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이 책은 신참 개종자의 사회주의에 대한 신행고백 모음이라해도 틀리지 않는다. 트랙터 공장에서 감명을 받았다며 그는 이렇게 적는다.
“공장이란 구차한 사람들이 할 수 없이 끌려가 고통스러운 노력을 자본주의에 팔고 있는, 그런 어둡고 슬픈 장소가 아니라 자유스러운 사람들의 창조적 기능이 오직 협조되는, 일대 공동 아트리에임을 느꼈기 때문이다.”
문학과 예술의 창달, 평등주의에 대한 열렬한 지향, 민족 정책에 대해서 저자는 칭송을 아끼지 않는다. 소비생활이 윤택하지 못한 것은 “16개 공화국이 다 잘살 수 있는 광범하고 평등한 공업기초에서부터 전력을 집중해온 때문”이라고 정부 대변인 같은 소리도 계속하고 있다.
일제 말기의 구차한 시절을 보낸 뒤에 뜻하지 않게 구경한 ‘놀라운 신세계’에 대한 감탄을 몇몇 특정인에게만 허용된 칙사 대접에 대한 답례라고 생각하는 것은 공정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진심에서 나온 말일 것이다. 문인의 초상이 흔하게 걸려있는 것이 저자에게는 선망과 감탄의 대상이었는데 따지고 보면 소련 사회 자체가 선망의 대상이었던 셈이다.
이 책은 많은 정보를 담고 있다. 그것은 생리적 특수조건을 이유로 1945년부터 초중등교가 남녀공학을 폐지했다던가, 4학기제라던가 하는 큰 사실로부터, 레닌 박물관에 있는 ‘대한민국 농민 연병호’의 순한문 조문(弔文)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흥미있다. 해방직후 사회주의 신참 개종자들의 의식과 동향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책이다. 그들은 사회주의 정부의 표방가치를 곧 실현가치로 간주하였다.
책에는 기회있을 때마다 근황을 알아보려한 단편소설 ‘낙동강’의 작가 조명희에 대한 언급이 세 번이나 나온다. 그의 가족이 타슈켄트에서 기차로 나흘 걸리는 ‘기슬로르다’란 농촌에 살고 있다는 것까지 알아냈으나 정작 본인 소식은 들을 수 없었다. 1937년에 비밀경찰에 체포되어 이듬해 간첩 죄목으로 처형된 사실이 알려질 리 없었다.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개방) 이전에는 중앙 아시아로의 고려인 이주를 말하는 것 자체가 금기사항이었다. 조명희의 소식을 알 수 없었다는 점에 이 책의 본질적 아이러니가 있다. 이태준의 후일담에 대한 궁금증에 대해서도 북쪽 인사들은 모른다는 말로 일관했다고 한다.
유종호(연세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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