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4년 7월 8일 앤 여왕 통치하의 영국 의회는 막대한 상금이 걸린 ‘경도(經度)법’을 발표한다. “경도를 2분의1도 이내로 정확히 측정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는 2만파운드, 3분의2도 이내로 정확한 방법에 대해서는 1만5000파운드, 1도 이내로 정확한 방법에 대해서는 1만파운드를 지급한다.”
1707년 10월 22일 밤 경도를 잘못 계산해 셔블 경과 그 휘하 약 2000명의 선원 거의 모두가 모국앞 바다에서 암초에 부딪혀 수장된 참사가 경도법 제정의 계기가 됐다. 당시 경도의 정확한 측정 방법을 확보하는 일은 대양을 제패하려는 유럽 열국의 간절한 소망이었다.
경도법 발효이후 18세기 거의 전기간에 걸쳐 이 해법을 놓고 무명 목수출신의 시계공 존 해리슨과 당대 최고의 천문학자들 사이에 자존심을 건 끈질긴 싸움이 계속됐다.
같은 위도상의 두 지점 사이의 1시간의 시간차는 경도로 15도(지구는 24시간 동안 360도 자전하므로 시간당 15도 움직이는 셈)의 차이에 해당한다. 따라서 정확한 시계를 이용하면 경도를 알아낼 수 있다는 것은 경도법 제정의 타당성을 검토했던 당대의 노(老) 과학자 뉴턴의 언급에서도 분명하다.
“한 가지 방법은 시계를 이용해 정확한 시간을 알아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배는 움직이고 기후도 더웠다가 추워지고 건조했다가 비가 내리는 등 시시각각 변하고, 또한 위도에 따라 중력의 크기도 달라집니다. 아쉽게도 그렇게 정확한 시계는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경도법이 제시한 2만파운드(오늘날의 금액으로는 수백만 파운드에 해당)의 상금을 받기 위해서는 하루에 오차가 3초 이내인 정확한 ‘해상시계’를 만들어야 한다. 이는 흔들리는 추를 이용하던 당시의 시계 제조기술로는 불가능하다는 점을 뉴턴이 지적한 것이었다.
목성 주위를 도는 네 개의 위성의 위치를 측정하여 경도를 알아내려던 갈릴레오를 선구자로 해 당대의 최고의 천문학자들은 답이 하늘에 있으리라는 강한 믿음을 갖고 열심히 하늘을 관측하고 있었다. 이런 천문학자들에게는 시계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생각 자체가 몹시 못마땅한 일이기도 했다.
천문학자들의 악의에 찬 방해 속에서도 해리슨은 일생을 해상시계를 제작하는데 바쳤다. 해리슨은 일생에 H-1, H-2, H-3 및 H-4라는 이름의 네 개의 시계를 만들었고, 마침내 1773년 6월에 이르러 경도법이 제시한 막대한 상금을 다 받게되는데 그의 나이 80세 때의 일이다. 물론 영국의 천문학자들도 경도 측정이 계기가 되어 열심히 천체를 관측한 덕분에 1884년 그리니치를 본초자오선으로 공인받게 된다.
복원된 해리슨의 네 시계는 1993년 그의 탄생 300주년을 기념하여 공개된 그리니치 왕립 천문대의 해리슨 전시실에서 아름다운 자태를 뻠내며 지금도 작동을 계속하고 있다.
뉴욕타임즈 과학기자를 지낸 저자 소벨은 이 책에서 존 해리슨을 중심으로 하여 18세기 경도와 관련되어 일어났던 과학사의 에피소드를 실감있게 기술했다. 소벨은 우리나라에도 널리 읽힌 ‘갈릴레오의 딸’의 작가로도 유명하다. 이 책은 1995년 출간돼 세계적인 갈채를 받았는데 후에 앤드루스가 합류해 풍부한 삽화를 담아 새로 내놓았다. 김진준 옮김, 원제 ‘The Illustrated Longitude’(1995년)
김경렬(서울대 지구환경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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