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들에게 가장 부러운 건 누구와도 쉽게 친구가 된다는 점이다. 세월의 때가 겹겹이 묻은 어른들에겐 편견과 아집의 틀을 깨고 마음을 통하는 친구를 사귄다는 게 점점 불가능하게만 느껴진다.
구절초 한 송이가 깊은 산속에 홀로 피어있다. 눈꽃을 보는 것이 소원인 구절초는 장대비에 몸이 젖고 바람에 흔들려도 꽃잎을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꿋꿋이 견디고 있다. 어느날 구절초 앞에 하얀색 아기 호랑이가 나타난다. 아름다운 삶을 찾아 세상으로 자신을 떠나보낸 엄마 호랑이가 그리워 울먹이고 있는 아기 호랑이. 구절초는 엉덩이를 쑥 빼고 옹달샘에 자기 모습을 비춰보다 물에 빠져 허우적 대는 아기 호랑이의 모습이 하도 우스워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고 만다.
“덩치만 큰 멍청이!”
‘어흥!’하고 화를 낼만도 한데 호랑이의 대답이 뜻밖이다. “맞아, 난 멍청이인가봐.”
계속 골려주고 싶은 마음에 구절초는 또 한 번 쏘아붙였다.
“넌 농담도 모르니?”
이렇게 해서 친구가 된 구절초와 아기 호랑이는 ‘이름짓기’로 서로에게 의미를 부여한다.
“너에게 어울리는 이름이 생각났어.”
“내 이름은 구절초인데?”
“그건 산기슭에 핀 꽃들도 마찬가지잖아. 이름이 있다는 건 네가 걔네들하고 다르다는 뜻이야. 흰눈이 어때? 넌 흰 눈처럼 꽃잎도 하얗고 또 앞으로 흰 눈도 볼 거니까.”
“난 그냥 흰 호랑이라고 부를래. 어쨌거나 내가 아는 흰 호랑이는 너밖에 없으니까.”
김춘수의 시에서처럼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던 구절초는 이제 흰 호랑이에게 하나의 의미가 된 것이다.
흰눈이(이제 그에게도 이름이 생겼다)가 눈꽃이 내리는 겨울까지 잘 버틸 수 있도록 흰 호랑이는 커다란 덩치로 비 바람을 막아주었다. 구절초에게 바다를 보여주기 위해 잔뿌리가 다치지 않도록 조심스레 땅을 파내 바다가 잘 보이는 절벽 꼭대기로 데려다주기도 했다. 이제 흰 호랑이는 비로소 엄마가 말했던 아름다운 삶이 어떤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 그것은 바로 사랑하는 친구와 아름다운 세상을 ‘함께 바라보는 것.’
흰 호랑이에게 함께 뛰어놀 친구를 찾아주기 위해 흰눈이가 눈꽃을 보겠다던 자신의 꿈을 접고 홀씨가 돼 멀리 멀리 날아가는 것으로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길들여진다는 것’의 의미를 통해 전 세계 어린이는 물론 어른들에게까지 진한 감동을 주었던 생택쥐페리의 ‘어린왕자’를 떠올리게 하는 이 동화는 자녀와 함께 책을 읽는 엄마 아빠들에게도 가슴 한 구석 어딘가 남아 있을지 모르는 조각난 동심을 새삼 깨우쳐 줄 것이다.
<김수경기자>sk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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