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재봉칼럼]햇볕정책이 키운 것

  • 입력 2001년 9월 5일 18시 29분


3일 김대중 대통령은 임동원 통일부장관의 해임 건의안이 국회에서 통과되기 직전에 가진 전국 시군구 의회 의장단과의 오찬에서 “남북 화해, 협력 노력이 깨져버리면 무서운 일을 치를 위험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정치 조직체인 국가가 긴급상태 직전에 있음을 최고 통치자가 언명한 것으로 대단히 심각한 충격을 준다.

화해 협력이 계속되면 전쟁을 뜻하는 ‘무서운 일’은 피할 수 있다는 것이어서 놀란 마음을 조금은 안도시킨다. 전쟁 위험을 경고하는 대통령의 판단이 어떤 정보에 의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지금 그 정도의 경고를 해야 한다면 대통령은 그 근거를 제시하여 국민에게 단결을 호소하고 화해와 협력을 위한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北의 실체 제대로 봐야▼

그러나 문제는 김 대통령이 말하는 그 화해와 협력이라는 햇볕정책이 과연 전쟁을 막는 길이냐 아니면 장기적으로 오히려 전쟁 위험을 증대시키는 것이냐에 있다. 대통령의 말을 따져보면, 북한은 전쟁을 생각하고 있다는 얘기며 그것을 막는 것은 남한의 몫이라는 얘기가 된다. 사태의 판단이 이렇다면 우리로서는 우리의 몫에 해당하는 부분을 심각하게 고려해 보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의 몫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국가 안위에 관한 전권을 쥐고 있는 최고 통치자의 태도를 먼저 생각해 보는 것이 실존적 현실 분석이다. 비록 야당 시절이기는 하나, 한 때 지금의 김 대통령은 독재 체제를 보호해주는 기능을 한다는 이유로 주한미군을 철수시켜야한다는 주장을 뉴욕타임스지에 공표하여, 통치 체제와 정치 공동체를 혼동하는 충격을 준 일이 있다.

나아가 남북문제와 연관하여 지금은 ‘낮은 단계의 연방제’라고 바뀌었지만 북의 고려연방제에 답하여 ‘공화국연방’이라는 것을 내세운 일은 기억에도 새로운데, 이것은 과거 소련의 국호인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연방’에서 앞부분을 뺀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이 대통령이 되기 전의 일이기는 하나, 지금에 이르러 북의 전쟁 야기 가능성을 지적하며 북이 실존적 적대관계에 있다는 것을 공표한 것은 대단히 다행한 현실인식이라고 인정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햇볕정책이 미친 남한 내에서의 영향에 대해서는 혼란스러운 감을 금할 수가 없다. 화해 협력이란 것이 일각에서 어떤 식으로 인식되고 있는가는 지난번 평양에서 열린 ‘8·15’ 행사 방문단이 야기한 사건에서 집중적으로 드러났다. 한마디로 ‘역햇볕’이 어떻게 전쟁 억지력을 약화시키고 있는가를 보여준 것이다. 방문단은 북에서 행한 전문적인 아지프로(선동선전)에 감동해 민족적 영웅이 된 듯한 착각을 한 경우도 있으리라고 여겨지는데, 놀라운 것은 한결같이 그 방문은 민간 차원의 것이며 그 쪽에도 모습과 말을 같이 나누는 인간들이 사는 사회라는 인식을 엿볼 수 있었다는 데 있다.

냉전과 열전을 경험하면서 북에 사는 존재들은 뿔 달린 금수와 같다는 증오 분위기에 무의식적으로 감염된 입장에서 보면, 분명 같은 사람들이 그 쪽에도 살고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발견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과거 공산주의 사회의 붕괴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시민사회’의 부재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다. 이를 망각하고 마치 상대를 경제적 경쟁자나 토론의 상대자처럼 인식하고 탈정치적 중립적인 민간교류라고 말하는 것은 순진하기 짝이 없는 목가적인 의식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전쟁억지력 약화 우려▼

대통령도 전쟁 야기 가능성을 말하고 있는데, 어떻게 경제고 종교고 간에 북에 간 행위가 탈정치적인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한국사회에서 중심적 지위에 있는 이들이 보여준 태도에서 읽을 수 있었던 것은, 대단히 인도적이고 평화적이며 고고한 윤리의식을 가졌다는 것인데, 그것은 정치단위간의 관계 논리에서 보면, 정치 없는 세상을 꿈꾸는 자유주의자가 갖기 쉬운 전형적인 타락상이었다.

이러한 주관적 태도가 가져올 객관적인 결과는 바로 전쟁에 대처하는 노력의 약화로 연결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지금 영웅들은 즐비한데 국가는 없는 꼴이다. 햇볕의 화해 협력은 위기만을 만들었다.

(전 국무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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