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릎이 닳아빠진 겉옷과 푹 눌러쓴 베레모, 커다란 배낭과 질질 끄는 듯한 느리고 무거운 발걸음. 내가 누구냐고? 나는 ‘부루퉁’ 할아버지야. 어허, 인석들, 그만 웃어. 내 이름이 그렇게 재미있니?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할아버지는 이곳 저곳을 다니며 생각을 모은단다. 아침 6시 반이면 어김없이 집을 나서지. 아침 일찍 일어나는 부지런한 어린이들은 창가에 앉아 내게 인사를 건네오기도 해.
가만 가만. 이 불룩한 배낭 안에서 삐죽삐죽 꿈틀대는 녀석들은 누구냐고? 이 녀석들이 바로 오늘 할아버지가 모은 생각들이야. 예쁜 생각, 미운 생각, 슬기로운 생각, 어리석은 생각. 종류도 가지가지야. 나는 생각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 내가 휘파람을 짧게 ‘휙’하고 불면 생각들이 내 배낭속으로 들어온단다. 어떤 녀석은 번개처럼 빠르게 날아오다가 구멍을 잘못 찾아 ‘쾅’ 부딪치기도 해. 집으로 돌아오면 생각들을 ‘가나다’ 순으로 선반에 정리해 놓는단다. ‘ㄱ’ 선반에는 고운 생각, 거친 생각, 기쁜 생각을, ‘ㄴ’선반에는 나쁜 생각, 노여운 생각, 너그러운 생각을…. 정리를 끝내면 난 생각들이 잠시 쉴 수 있는 시간을 준 뒤 집앞 화단에 잘 골라놓은 흙 속에 이 녀석들을 심는단다. 다음날 아침이면 생각들은 꽃으로 피어나지.
그리고 아침해가 밝아올 때쯤 ‘일’이 시작되는 거야. 꽃들이 작은 조각들로 부서져 먼지 알갱이처럼 공중에 나부끼거든. 얼마나 아름다운지! 마치 햇빛 속에서 춤을 추는 것 같아. 너희들도 그 광경을 보고 싶다고? 그건 안돼. 생각들은 아주 수줍음이 많아서 낯선 사람 앞에서는 꼭꼭 숨어버리거든.
그럼 공중으로 날아간 생각들은 나중에 어떻게 되는거냐구? 원, 녀석 급하기도 하지. 부서진 생각들은 바람에 실려 떠다니다가 열린 창문이나 문틈, 벌어진 틈새로 집집마다 내려앉는단다. 그리고 꿈꾸고 있는 사람들의 이마에 내려앉아 새로운 생각으로 자라나게 되는거지. 사람들의 생각이 저마다 다른 건 바로 그 때문이야. 내가 아니면 똑같은 생각들이 늘 되풀이 되다가 영원히 사라져 버릴지도 몰라.
어른들은 너희들에게 늘 말하지. “그 때가 제일 좋을 때란다.” 그렇지만 이 할아버지는 알아. 너희들도 여러 가지 생각들로 머리 속이 복잡하잖아. 이 ‘부루퉁’ 할아버지는 너희들이 생각을 정리해서 영원히 새로운 꿈을 꿀 수 있도록 도와줄게. 너희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말이야. 오늘 학교에서 기분 안좋은 일이 있었니? 이제 머리를 비우고 잠자리에 들렴. 내일 아침이면 새로운 생각들이 네 머리에 내려 앉아 또다른 꿈을 꾸게 할테니까.
<김수경기자>sk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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