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초강대국 '미국의 힘'…그 빛과 그늘

  • 입력 2001년 9월 21일 18시 33분


《냉전체제 붕괴 후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세계체제의 개편, 국경의 붕괴 등 온갖 사회과학적 주장들이 난무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 워싱턴과 뉴욕에서의 테러사건만큼 우리가 이미 새로운 세계질서 안에 들어와 있음을 확인시켜 준 일은 없었다. 이 사건에 대처하는 사람들의 자발적 반응과 주변의 압력을 보면 현재 세계질서는 외형적으로든 심리적으로든 미국과 비(非)미국으로 나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침 이 시기에 나온 두 권의 책이 미국과 비미국의 현 세계구도를 두 측면에서 설명해 준다. ‘국가의 퇴각’은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인 미국이 비미국의 일원으로부터 무차별 공격을 받게 된 아이러니컬한 현 상황을 미국 밖의 시각에서 해설한다. 또 다른 책 ‘미국은 과연 특별한 나라인가’는 이미 ‘특별한 나라’라고 여겨지는 미국이 ‘특별’해진 이유를 그 내부 요인들을 중심으로 풀이해 준다. 두 책을 비교하면서 함께 읽는다면 앞으로 세계질서가 어떻게 변화해 갈 것인지를 짐작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

◇ 국가의 퇴각/ 수잔 스트레인지 지음/ 336쪽 1만5000원 푸른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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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유일 초강대국과 테러집단 사이의 전쟁. 미국의 부시 대통령은 세계무역센터와 국방부에 대한 테러공격과 이에 대한 미국의 보복을 21세기의 ‘새로운 전쟁’으로 규정하고, 보이지 않는 적에 대한 단호한 응징을 천명하고 있다.

우리들의 관념 속에 있는 전쟁이란 통상적으로 국가와 국가사이의 무력충돌을 의미한다. 그리고 여기에는 국제적으로 발전한 나름의 교전규칙들이 존재한다. 그런데 이번 ‘전쟁’은 국가 대 테러집단 사이의 충돌이고, 민간인에 대한 무자비한 공격이며, 교전의 일방은 보이지도 않는다. 전쟁의 양상에 본질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이런 변화는 어디에서 연유하고 있으며, 이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마침 영국 출신의 저명한 국제정치경제학자인 수잔 스트레인지(1923∼1998)의 생애 마지막 역작인 이 책이 국내에 번역돼 다행스럽다. 스트레인지는 미국의 주류 국제정치이론들을 반박하면서 자신의 독특한 이론적 시각을 형성했다. 그는 국가와 군사력을 중시하는 현실주의자들을 ‘애꾸눈’이라고 비판했고, 시장 효율성과 국제협력을 강조하는 자유주의자들의 순진함을 꼬집었다.

스트레인지의 이론적 시각에서 이번 테러 사태의 원인과 결과를 따져보면, 오늘날 국제관계는 군사력 외에도 금융, 기술(지식), 생산에 있어서의 영향력이 권력관계 형성의 핵심적 요인들로 작동하고 있다. 힘이란 단순히 누구에게 직접적으로 행사될 때에만 작동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남들이 살아가고, 결정하고, 결과를 산출하는 조건에 대한 영향력을 통하여 남들의 행위를 통제할 수 있다. 그는 이런 힘을 ‘구조적 힘’이라 규정하고, 오늘날 국제관계의 위계구조를 형성하는 근본적 요인으로 이런 힘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면 오늘날의 정치와 국제관계에 도대체 어떠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가? 기술의 발전, 금융의 세계화, 초국적기업들의 활동 증대로 특징지어지는 경제의 세계화는 오늘날 국가의 안팎에서 심대한 변화를 초래하고 있다.

스트레인지는 이런 변화들을 세 가지로 압축해서 제시하고 있다. 첫째로, 강대국과 약소국 사이에 구조적 힘의 불균형이 획기적으로 증대되고, 둘째로 국가로부터 시장으로 힘이 이동하고 있으며, 셋째로 힘이 강대국이나 시장으로 이동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일부는 아예 사라져 힘의 공백이 형성되고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구조화된 힘의 거대한 불균형, 비인격적 시장기구의 권력증대, 힘의 공백상태가 오늘날의 세계를 특징짓고 있다는 것이 스트레인지의 진단이다.

이런 상태가 초래하는 현상 중의 하나로 그는 이번 미국 연쇄 테러와 같은 ‘범죄 및 범죄집단의 세계화’에 주목하고 있다. 경제의 세계화, 국가권위의 약화, 힘의 공백이 범죄의 세계화를 위한 비옥한 토양을 제공해 주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민주성 결핍’이 심각한 국제관계에서 미국으로의 힘의 편중은 미국의 절제를 상실하게 만들고, 미국의 행동에 대한 불만과 저항을 부추긴다.

그런데 전통적인 의미의 전쟁을 포함해 정상적인 국제관계의 행동을 통해서는 그런 불만과 저항을 표출하고 해결할 수 없다. 국가 간의 거대한 힘의 불균형과 비인격적 시장의 구조적 힘이 그러한 통로를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현 질서에 대한 저항세력들은 비정규적인 방법으로, 민간인을 상대로 한 무자비한 테러를 감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극단적인 비인간성에도 불구하고 일부의 박수와 환호까지 받으면서. 이번 테러사태의 근원은 이러한 시각에서도 이해될 수 있다. 양오석 옮김. 원제 ‘The Retreat of the State’(1996).

정진영(경희대 교수·국제관계학)

◇ 미국은 과연 특별한 나라인가/ 김봉중 지음/ 332쪽 1만2000원 소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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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역사적 책임은 테러를 응징하고 악의 세계를 제거하는 것이다. 미국이 벌일 21세기 첫 전쟁은 ‘십자군’ 전쟁이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최근 대 국민 연설에서 테러 세력에 대한 강력한 응징 의지를 표현했다.

‘인종의 용광로’에 사는 미 국민들은 자동차 유리창에, 티셔츠에 성조기를 붙이고, 손에 들고 행진하는 ‘성조기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 같은 이슬람 국가에서 이민 온 아랍계 미국인들도 성조기 행렬에 동참하며 ‘단결’을 외치고 있다.

이슬람 근본주의자의 테러에 오히려 ‘추악한 전쟁’을 내걸며 전쟁도 불사하는 미국은 대체 어떤 나라인가? ‘선택받은’ 나라이자 ‘잘 난’ 나라, 미국으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나? 미국외교사 전문가인 김봉중 교수(전남대 사학과)는 미국이 우리의 모델도 아니며, 모델이 될 수도 없다고 말한다.

미국을 미국으로 만든 역사적 원천은 무엇일까? 미국을 특별한 나라로 만들었던 것은 다름 아닌 미국인의 선민의식이다.

인종과 출신을 가리지 않고 미국인은 서유럽 중심의 ‘보편적 역사’에서 벗어난 예외적 존재라고 믿는다. 그들에게는 봉건제도도 없었고, 사회주의도 없었다. 자유주의도 유럽의 역사와 달리 건설적이었다. 그리고 최초로 성공한, 국민이 국가의 주인이 되는 시민사회 혁명을 낳았다.

나아가 그들은 성서의 이스라엘에 이어 신으로부터 선택받은 ‘민족’이라 믿었다. 그들의 이상은 세계와 인류의 역사를 널리 밝히는 ‘언덕 위의 도시(City on the Hill)’였다. 선민의식에 가득 찬 미국인들은 ‘세계의 경찰’로서 세계의 안전과 미래를 책임져야 할 역사적 종교적 사명을 지녔다고 믿는다. 테러 응징은 또 하나의 성전(聖戰)인 셈이다.

선민의식의 신념과 실천은 미국 역사의 창조적 원동력이다. 저자는 네 가지의 역사적 코드 즉, 미국의 서부, 미국식 민주주의, 미국의 남북 지역정서, 다문화주의에 대한 서사적 역사서술을 통해 미국의 정체성을 날카롭게 해부한다. 그러나 저자는 ‘미국은 왜 위대한가’라고 묻지 않는다. 다만 미국이 미국인 까닭을 겸허하게 묻는다.

해답은 미국은 자신의 더럽고 추악하며 비극적인 모습을 감추지 않고 오히려 이를 미국식 ‘신화’로 창조함으로써 자유민주주의라는 미래의 이상을 현재에 구현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미국을 미국답게 만드는 방식이 있다.

‘미국은 과연 특별한 나라인가?’ 저자의 도발적 질문 이면에는 이러한 미국에 대해 한국인이 갖고 있는 이율배반적인 태도에 대한 냉소적인 비판이 깔려 있다. 결국 이 책은 미국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우리의 왜곡된 자화상에 대한 이야기로도 읽힌다.

그렇다면 질문을 바꿔보자. ‘미국은 우리에게 어떤 나라였나?’ 지금까지 우리에게 미국은 정치제도와 경제체제의 이상이며 우상이었다. 미국에서 수학하고 온 정치경제 엘리트들은 미국제도를 인류의 보편적 꿈이자 필연적 미래로 여기고 숭배해 왔다. 다른 한편에서는, 미국은 우리의 국가현실과 국가이성을 무효화시키는 파시즘적 권력상징이기도 했다. 국수주의적인 문화 엘리트들은 미국 역사를 ‘돈과 효율성’에 최대의 가치를 두는 저질의 역사로 치부하기도 했다.

이 책은 이렇게 미국이 우리의 비극적 현실과 모순적 미래를 감추는 쇼비니즘적 권력상징이었음을 일깨워준다.

아울러 이런 과거를 치장하지 않고 냉엄하게 비판할 수 있는 풍토와 역동성에 바로 ‘미국다운 미국’이 있음을 잘 보여준다.

조지형(이화여대 교수·미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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