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규철칼럼]‘지금 큰 판을 놓치고 있다’

  • 입력 2001년 9월 26일 18시 21분


자고 나면 번지고 있는 이용호씨 비리 의혹사건에 대해 검찰이 별로 들어 보지도 못했던 특별감찰본부까지 설치한 것을 놓고 검찰수사에 대한 주문이 많다. 흐지부지 하다가는 옷로비사건 때처럼 검찰 밖 사람들이 수사를 꿰차고 들어오는 특별검사제 실시라는 망신을 당할 수 있다는 경고다. 게다가 여야가 특검제에 합의했으니 검찰로서는 바짝 긴장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기본적으로 투명하고 철저한 검찰수사를 통해 여러 의혹이 규명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동안 집권여당은 권력형비리 의혹사건 때마다 검찰수사결과에 모든 것을 미뤄왔다.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국정운영을 맡은 집권여당이라면 그래서만은 안 된다. 대형 비리의혹사건이 터지기만 하면 집권여당은 검찰이란 방패막이 뒤에 몸을 사렸으나 뜻대로 된 적이 없다. 옷로비사건은 말할 것도 없고 얼마 전의 정현준씨 사건은 요즘 국가정보원 간부 수뢰연루의혹으로 또 다시 어느 방향으로 튈지 모를 지경이 됐다. 검찰은 수사하고 형사절차를 밟을 뿐이다.

▼잇단 비리사건에 성난 시민▼

민심을 읽으면서 사회적 국가적 차원에서 판단해야 하는 소위 ‘정치한다’는 사람들이라면 전후좌우를 내다봐야 하는데 지금 돌아가는 형편을 보면 아무래도 아닌 것 같다. 민심을 추스르는 일이 바로 정치의 시작이고 끝이다. 그 일이 귀찮고 피곤한 것이어서 피하고 싶은 심사였다면 아예 정치에 나서지 말아야 한다. 검찰을 앞세우고 집권세력은 그 뒤에 숨는 과정에서 검찰의 권력시녀화니, 정치검찰이니 하는 말도 생겨난 것이다.

집권세력은 지금 큰 판을 놓치고 있다. 국민이 분노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 분노의 뜨거움도 모르고 있다. 왜 분노하는지 아는가. 의혹사건 무대에서 거론되는 면면들을 보라. 전직장관 검찰간부 국정원간부 경찰간부 등 모두 힘있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의혹사건과 관련된 액수는 보통 몇 백억원대다. 보통 시민으로서는 거리감을 느끼고 상상할 수 없는, 사람들이고 돈이다. 더욱이 교묘한 돈거래 과정에서 몇 십억원대의 시세차익을 챙겼다고 하는데 그 과정에서 녹아난 것은 보통사람들이고 그들의 사연 많은 돈이다. 또한 지연과 학연이란 연줄에 얽히고 설킨 거대한 비리의 고리를 보아야 하는 더 많은 사람들의 심정이 어떻겠는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비슷한 권력형비리 의혹사건이 되풀이해 불거져 나오고 있다는 것이 사람들을 더욱 성나게 하고 있다. 현 정권이 도덕성을 강조하면서 높이 치켜든 개혁의 깃발도 이쯤 되면 무색해질 수밖에 없다.

▼왜 '소리없는 분노' 인가▼

이번 의혹사건을 최종적으로 어떻게 처리하든 그것은 권력의 몫이다. 사건 종결을 크게 하든, 작게 하든 민심 무마용으로 몇 명 옷 벗기고, 몇 명 잡아넣든 간에 그것은 전적으로 칼자루를 쥔 권력의 몫이다. 권력구조상 이에 덤벼들 세력은 없다. 이번 의혹사건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것이 있다. 대형비리 의혹이 불거지기만 하면 으레 고위층 인척이나 실세들의 개입설이 나돌게 되고 또 그 때마다 집권세력은“우리는 관련이 없다”는 자기방어에만 급급해 하는 모습이다. 물론 관련이 없다면 당연한 말이겠지만 그 사건으로 인해 빚어진 국민의 분노를 방치했다는 데 문제가 있다. 분노하고 실망한 국민의 심정은 외면해버리는 정치세력이라면 누가 지지를 보낼 것인가.

집권세력에서는 아직도 옷로비사건은 ‘실패한 로비’로 규정하고 있다. 로비사실을 입증할 구체적 증거가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맞는 말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 정권에 대한 지지율이 내려가기 시작한 것이 바로 옷로비사건 이후부터였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 내리막 곡선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정권에 대한 분노와 실망은 조용하지만 미묘하게 표출된다. 의혹사건 처리만 민심을 화나게 한 것이 아니다. 인사정책 개혁작업 등 국정운영 곳곳에서 많은 사람들은 여론을 헤아리지 못한다고 분노하다가 이제는 지쳤다. 그래서 조용한 것처럼 보인다. 민심을 함께 끌고 가지 못하면 남은 임기 1년반 동안 무슨 정책을 어떻게 펴나갈 수 있겠는가. 박수소리에만 쉽게 빠지지 말고 ‘소리 없는 분노’를 살필 줄 알아야 한다. 자부심 강하면서 소박하고, 준엄하면서도 온유한 사람들이 아직은 많다는 것이 어쩌면 지금 집권세력에겐 유일한 위안이다.

<논설실장>ki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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