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산의 캐릭터열전]'비상계엄'의 엘리스

  • 입력 2001년 9월 27일 18시 40분


미국은 자신들이 테러의 배후로 지목한 이슬람 지도자를 사막의 산악지역으로부터 납치하여 본국으로 송환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발단이었다. 백주의 뉴욕거리가 무차별 테러의 표적이 된다. 현장에 출동한 FBI 테러담당관 앤서니(던젤 워싱턴)는 경악한다. 인질극을 벌이던 테러리스트들이 ‘아무런 요구조건도 제시하지 않고’ 그대로 자폭해버렸기 때문이다. CIA 비밀요원 엘리스(아네트 베닝)는 뜻 모를 탄식을 한다. “나는 저들의 수법을 알아요. 우리가 교육시킨 그대로예요.”

▼아랍세계서 자란 美비밀요원▼

처음 영화 ‘비상계엄’(원제 The Siege·1998년)을 봤을 때 나는 개연성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미국이 아랍계 테러리스트들을 교육하고 지원했다고? 그런데 그들이 이제 총부리를 미국의 심장인 뉴욕으로 돌렸다고? 할리우드도 더 이상 팔아먹을 소재가 없었나보군. 이따위 황당무계한 가설에 떼돈을 들여 블록버스터로 만들고 말이야.

그러나 현실은 늘 상상을 초월한다. 1980년대의 CIA가 아프간에 침공한 소련을 축출하기 위하여 무자헤딘을 양성하고 지원했다는 것은 이제 공공연한 비밀이다. 미국은 아프간 국경지대에서 43개국 출신 10만명 이상의 무슬림들을 게릴라로 교육시켰고 그들을 ‘자유의 전사’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제 국제정세가 변하자 그들을 ‘제거 대상’으로 분류하여 초토화시키려 한다. 시나리오로 치자면 완전 ‘양아치’ 플롯이다. 내적 필연성은 커녕 최소한의 윤리조차 결여된 쓰레기 같은 작품이다.

‘비상계엄’의 엘리스는 분열된 캐릭터다. 그녀는 아랍에서 자라난 미국인으로서 그들에게 테러수법을 전수했고 함께 행동해왔다. 이제 미국에게 버림받은 그들이 대미 성전을 선포하자 그녀는 갈등한다. 엘리스는 아랍계 동료들을 사랑하지만 미국의 국익도 외면할 수 없다. 그래서 그녀는 CIA에 협조하면서도 테러리스트들을 보호하려 애쓰는 모순투성이의 존재가 된다. 테러와 전쟁 역시 정치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인정한다면, 이 부도덕한 현대정치의 모순과 분열이 그대로 투영된 캐릭터가 바로 엘리스인 것이다.

‘비상계엄’의 악몽은 이제부터다. 민간인들의 자의적 보복과 그에 맞서는 또다른 테러가 계속 상승효과를 일으키자 뉴욕은 치안부재의 야만상태로 변한다. 미국정부는 결국 계엄령을 선포할 수밖에 없다. 계엄사령관으로 임명된 윌리엄 장군(브루스 윌리스)이 엄청난 병력을 이끌고 브룩클린교를 건너 뉴욕을 접수하는 장면은 이 영화의 압권이다.

▼옛동료와 국익사이서 갈등▼

그리고 중세의 마녀재판을 방불케하는 군부독재의 공포정치가 시작된다. 모든 아랍계 미국인들을 무차별 체포하여 수용소에 격리시킨 채 끔찍한 고문과 사형이 자행되는 것이다(이 영화의 개봉 당시 아랍인들이 대대적인 반대시위를 벌인 것은 당연한 반응이다).

미국인들이 늘상 떠벌리는 표현대로 자유와 민주주의가 미국을 지탱하는 두 개의 기둥이라면, 그 기둥들은 너무도 간단히 무너져버렸고, 따라서 더 이상 미국은 없다. ‘비상계엄’은 엘리스를 순교시킴으로써 할리우드적인 엔딩을 만들어냈다. 미국은 과연 무엇을 순교시킬 것인가? 그들에게 도대체 엔딩을 연출할 만한 능력이나 있는 걸까?

심산 <시나리오작가>besmart@netsg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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