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포럼]송상현/인류에 새 과제 던진 美테러

  • 입력 2001년 9월 27일 18시 51분


미국의 심장부가 테러범이 납치한 민간 항공기에 의해 강타당하고 무고한 생명이 희생되는 장면을 TV로 지켜보면서 인간의 말로써 표현함이 때로는 얼마나 부적절한가, 그리고 참사를 목격한 순간에 우리를 휩싸안은 감정을 나타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실감하였다. 다만 인간의 본성이 이처럼 극악무도할 수도 있음을 보면서 상당한 시일이 지났음에도 무기력한 상태에서 막연한 공포감을 떨치기 어려울 뿐이다.

사람은 누구나 인간사에서 자기 생일, 각종 기념일, 제삿날, 기타 자기에게 의미가 깊은 날들을 기억하고 지킨다. 그 밖에도 국가적 기념일이나 역사적, 문화적 사건이 일어난 날을 모두 같이 기념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우리는 분단국가에 살면서 충격적이고 끔찍한 사건의 발발을 수없이 경험해서 그런지 웬만한 경우에는 잘 놀라지도, 기억하지도 않는다.

▼더 많은 희생-혼란 부를 수도▼

그래도 예컨대 남북정상회담이 열린 2000년 6월15일이라는 날짜는 당시의 충격을 넘어 우리의 남북관계에 관한 인식과 정책방향을 근본적으로 바꿔 놓은 날이었기에 오래 기억함은 물론 우리의 역사에도 남을 것이다. 미국에서 사상 최악의 테러참사가 발생한 2001년 9월11일은 지구상에 테러 없는 평화를 추구하는 이들, 특히 미국인들에게는 영구적으로 기억해야 할 날이 될 것 같다.

일본의 진주만 공격 이후 미국인들에게 이보다 더 충격적인 날이 또 있었을까. 증권시장이 폭락했던 소위 ‘검은 월요일’ 등은 비교할 수도 없고, 소련이 스푸트니크호를 지구 궤도에 쏘아 올려 과학기술의 최선진국이라고 자부하던 미국의 자존심을 여지없이 짓밟은 1957년 10월4일 정도가 아닐까. 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1989년 11월9일은 어떠한가. 미국은 이 사건에 서방진영의 승리라는 의미를 부여하면서 세계질서가 미국 일변도로 재편돼 앞으로는 미국 중심으로 세계를 이끌어갈 수 있게 됐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군비경쟁에 쏟아 붓던 예산을 교육이나 복지 등에 전용해 좀 더 살기 좋은 세상이 오리라고 기대한 사람도 많았다.

엄청난 일이 발생한 날들의 리스트는 더 길어질 수도 있겠지만 일회성 충격적 해프닝을 뛰어넘는 이런 날들이 갖는 공통점은 무엇인가. 그런 사건이 발생함으로써 세상이 바뀐다는 점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엄청난 사건이 초래하는 심대한 변화의 의미와 영향을 인류가 천착하고 깨닫게 되는 데는 긴 세월이 필요하고 따라서 그 대응도 너무 느리기 마련이다.

미국의 테러참사도 일시적 충격 후 잊혀질 단순한 사건이 아니다. 인간의 자유와 기본인권을 지키고 평화를 유지하려는 인류의 노력이 중대한 도전에 직면한 것이고 이러한 보편적 의지와 약속이 앞으로 힘들고 때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방법으로 계속 시험대에 오를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에 인류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켜온 기폭제는 전쟁, 기술, 종교 또는 중상주의적 모험주의 등이었다. 그러나 인류사회가 성숙하고 세계화의 방향으로 진전되자 특히 금세기에는 법을 변화의 촉매제로 삼아 좀 더 안정성과, 예측 가능성과, 투명성을 토대로 인류사회의 평화와 번영을 추구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이번 테러참사는 법의 지배를 질서유지와 사회변혁의 촉매제로 삼아 새로운 세기를 펼치려는 인류의 패러다임에 근본적 타격을 가한 것이다. 인류의 역사를 상당히 후퇴시킨 결과가 되어 앞으로 더 많은 희생과, 혼란과 시행착오의 카오스를 경험하면서 값비싼 변화의 대가를 치러야 할지도 모른다. 뉴욕시가 테러의 현장에 다시 복구의 기치를 높이 내걸어도 도시의 성격이나 그곳의 삶은 영구적으로 변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모두의 평화 고른 번영 추구를▼

그러나 이제는 정신을 차려서 총체적 시스템의 재정비 또는 우선순위의 재조정에 착수해야 하고, 나아가서는 인간의 기본적 인권을 지키면서도 고른 평화와 번영을 확실하게 이끌어 갈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을 모색해야 한다.

1, 2차 세계대전을 비롯하여 이번 테러에 버금가는 사건들이 인류사회를 바꿔 놓은 경우는 과거에도 있었으므로 역사 속에서 교훈을 찾아 현대적 의미로 해석하면서 이 엄청난 과제의 단서를 찾아야 할 것 같다.

송상현(서울대 교수·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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