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는 유명 작가·시인·평론가로 자타의 인정을 받는 이들이 중·고교 시절에 쓴 습작들이 한데 모여있습니다. 소설편에서는 김승옥 김원일 오정희 윤후명 이청준 최인호 황석영 등 17명, 시편에는 남진우 문충성 안도현 이산하 이해인 정호승 피천득 등 60명의 쟁쟁한 이름을 만날 수 있습니다.
습작이라고는 하지만 대부분 60-70년대 문학도들이 필력을 겨루었던 대표적인 학생 문예잡지 <학원>을 비롯해, 각종 교지 백일장 문예콩쿠르에서 입상한, 당시로서는 수준급 작품들입니다. 거개가 지금은 '그 때 그 시절'을 다 잊어버려 세간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작품들이라 문학사료로서 가치도 남다르다 하겠습니다. 지금도 문학가의 꿈을 키우고 있는 나이 어린 문청(文靑)들에게는 '습작 글본'으로도 유용하게 쓰일 듯합니다.
수록작들을 차근차근 읽다보면 행간에는 문학에 대한 풋풋한 열정과 순결한 초발심으로 가득한 것이 느껴집니다. 지금은 문학으로 일가를 이뤘지만 그 시작은 미약했던 것. 때로는 치기와 서투름, 육화되지 않은 생경한 관념어를 보다보면 배시시 미소가 나오기도 합니다.
소설편 머리에 실린 김승옥씨의 엽편소설 '서점풍경'(1958년 순천고 3년)을 볼까요. 1962년 단편 <생명연습>으로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등단한 김씨는 당돌하게도 고교시절부터 '김학길'이란 필명까지 사용하며 <학원> 잡지에 자주 글을 실었습니다. 이 소설은 한 고등학생이 동네 책방에 들러서 <법학통론> <정신분석학> <한국현대문학사> 등 어려운 책을 뒤적이거리며 거창한 장래를 다짐하는 독백이 실렸습니다. 하지만 주인공이 마지막에 주인에게 내민 것은 영어참고서였던 것이죠.
훗날 '무진기행' 등 인간 실존에 대한 탐구로 필명을 날린 김씨의 작품답지 않은 유머러스한 소품입니다. 하지만 60∼70년대 대표적인 학생문예잡지 '학원' 편집위원이었던 김의석씨의 당시 코멘트는 가차없더군요. "서점에 가면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하게 되는 이야기다. 그러나 필요 없는 군더더기가 많다."
허나 '될성 부른 작가'는 '떡잎'부터 알아보는 법입니다. 수록작 중에서는 김원일의 <누님>(대구농고 2년), 이청준의 <닭쌈>(광주일고 1년), 이제하의 <멱살과 여학생>(마산고 1년)의 필력을 보고 누가 고등학생의 것이라고 믿을까요.
때로는 청소년의 전매특허이자, 문학도들에게 일반적인 '겉멋'이 보이기도 합니다. 초등학교 5학년때부터 공책에 소설을 써서 급우들에게 회람시킨 전력을 가진 최인호의 <반항 뒤에 오는 것>(서울고 1년)을 보십시오. 중학교 3학년인 주인공이 담배와 술을 탐하고, 박정희의 '혁명공약'에 분노를 삭히고, 매사에 반항적인 폼새가 몸에 밴 것이-작가는 불쾌할 지 모르지만-영락없이 반항의 아이콘인 제임스 딘을 떠올리게 합니다.
최인호와 함께 고교 2학년 약관의 나이에 당당하게 문단에 입성한 황석영의 문재(文才)는 가히 혀를 내두를 정도입니다. 지금의 <창작과비평>에 견줄만한 60년대의 대표적인 문예사상지인 <사상계> 신인문학상에 입선한 <입석 부근>(1962, 경복고2년)에서 보여주는 암벽 등반 묘사의 긴장감이란 성인 작가를 무색하게 할 정도입니다. 그리고 "모든 사랑은 밖에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고, 그 속으로 파고 들어가서 직접 그것과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행동에서부터 출발한다"는 문구는 자신의 고달픈 문학적 운명을 예견한 듯 읽히기도 합니다.
조숙함으로 치자면, 수록작중에서는 오정희의 <노래기>(1964, 이화여고2년)에 필적할 작품이 없을 듯합니다. 폐병에 걸려 암자를 찾은 고등학생 기현의 불우한 가족사와 내면의 갈등을 그린 단편소설이지요. 인간 본성에 대한 성찰과 이야기 구성의 탁월함은 ‘거울 앞에 돌아온 누님’ 같은 30-40대의 감수성이란 점에서 여고생의 귀기(鬼氣)마저 느껴집니다.
이야기에 기반한 소설에 비해서 감정을 재료 삼아 요리하는 시들은 나이의 흔적을 지우기 어려운 모양입니다. <내가 그 나이였을 때 시가 나를 찾아왔다>에 실린 대부분이 시에서는 사춘기의 열병을 앓는 듯한 감정의 과잉이 많이 보입니다. 이를 가리기 위함인지 '정야(靜夜)' '독무(獨舞)' '점경(點景)' 같은 어려운 한자어를 제목으로 삼아서 성인작가연하는 치기도 보입니다.
문정희 <플래카드>(1965, 진명여고 3년)에서 ‘학처럼 목을 뽑고 / 태양을 목메이게 부르는 아우성이 / 소나기처럼 지나간 자리/ … / 내 모국어를 펄럭이지 않아도 좋으리’에서 어렵지 않게 유치환의 시 <깃발>의 심상을 떠올릴 수 있는 것처럼, 오세영의 <가을>(1959, 전주신흥고 2년)이 라이너 마리어 릴케의 어떤 시를 연상시키는 것처럼, 몇몇 작품에서는 애송시들의 그림자를 벗어나지 못한 흔적들이 보이기도 합니다.
이와는 달리 사춘기적 감성에서 어느정도 벗어난 작품을 꼽으라면 안도현의 <연>(1978, 대구대건고 2년)이 가장 돋보입니다.
“오색치마연 / 아득히 어디로 날리우는 것일까. / 바람빛 연한 사랑을 채워둔 한지(韓紙)에 / 항시 곧고 가는 낱말이 / 떨림으로 자라는 댓살에 / 수만의 땅을 물고 가는 / 건강한 바람의 어깨를 보았으리. / 구천(九天)을 돌아온 연줄의 / 풀어도 풀어도 끝이 없는 / 의지(意志)를 보았으리. / 훠어이 훠이 / 언덕받이에선 휘파람 소리 / 서둘지 않고 우리들의 새벽은 / 귀는 여는가.”(<연>중에서)
1978년 학원문학상 당선작으로 이 시를 고른 시인 황동규와 문학평론가 김현은 심사평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소간의 관념어의 흔적을 가지고 있지만 적극적인 사랑으로 성공한 작품이다. 그 사랑은 무엇보다도 힘찬, 그러면서도 절제된 리듬 속에 살아있다…. 앞으로 한국의 좋은 시인 하나를 가지는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이산하의 <길>(1978, 부산혜광고 3년)을 보면, “동트는 새벽 어디쯤 / 샘터에 솟는 물 한 방울을 위하여”나 “어머니 같은 손짓들이 내려앉는 들길을 / 바람 따라 걸어 보면 / 이젠 정말로 모진 바위틈에 비벼대는 / 연약한 풀꽃들의 생각밖엔 나지 않는다”는 구절을 보다보면 ‘운동권 시인’의 징후가 감지된다면 자의적인 억지 해석일까요.
또 한가지, 이 책에는 시나 소설, 평론으로 미분화된 문학청년들의 습작시를 보는 즐거움을 빼놓을 수 없을 듯합니다. 문학평론가 김병익 김화영 민용태, 소설가 고원정 김승옥 윤후명 최인호 한수산 등이 중, 고등학교때 감성을 만날 기회가 어디 흔한가요.
*「윤정훈 기자의 글동네 이야기」에 있는 ‘신작소개’ 코너에는 <내가 그 나이였을 때 소설이 나를 찾아왔다>에 실려있는 김승옥,오정희씨의 작품 전문을 게재했습니다.
<윤정훈 기자>diga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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