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재봉칼럼]테러와 북한의 딜레마

  • 입력 2001년 10월 17일 23시 17분


냉전과 6·25전쟁의 경험을 통해서 보았듯이, 이질적인 체제간의 투쟁은 시민전쟁과 국가간 전쟁의 양상을 혼합적으로 갖게 된다. 따라서 서로 양립될 수 없는 이질적인 이념을 가진 정치집단간의 국내적인 투쟁도 객관적으로는 국가간 투쟁과 같은 성격을 갖게 된다.

그러므로 열전이 자리잡게 되면 타협은 어려우며 서로 상대방의 체제 전복이 불가피하게 투쟁의 목적으로 자리잡게 된다. 강대국 차원에서 냉전이 끝난 것은 궁극적으로 한 체제가 붕괴됨으로써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남북한은 아직도 이런 성격의 투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북한은 이런 조건에서 적극적으로 공세적인 전략을 통해 남한의 체제 붕괴를 기도해 온 데 반해서 남한은 방어적인 전략으로 대처해왔다. 전쟁 원인에 해당하는 갖가지 테러를 감행하면서 북한은 줄기차게 남한의 체제 전복을 꾀해 왔고, 그 결과로 테러국가를 지칭하는 ‘불량국가’의 리스트에까지 올라 지금에 이르고 있다. 현재의 김대중(金大中) 정부는 이런 상황의 변화를 모색하는 이른바 햇볕정책을 실현하여 상당한 성과를 얻은 것으로 스스로 평가하고 있다.

▼北 정체성 붕괴 우려 '상봉' 미뤄▼

그런데 갑자기 미국에서 동시다발 테러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대해 국제적으로 이구동성으로 그 행위를 문명세계에 대한 선전포고라거나 인류 전체에 대한 침공이라고 규탄하고 나섰으며 보복이 아닌 단죄(斷罪) 목적의 공격이 가해지고 있다. 그런데 북한이 느닷없이 이산가족 상봉을 무산시키면서 다른 회담은 지속한다는 방침을 통고해 왔다. 이것이 무슨 의미를 지닌 것인가에 대한 해석이 분분하다.

경제적인 큰 대가를 바라고 취한 행동이라면 식량 지원을 남한에서 발표한 것으로 그 정도의 행사에는 충분하고도 남는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이산가족 상봉이라는 것이 인도적 성격을 띠고 있다는 데 있다. 이것은 테러라는 것과 정반대의 것이다.

현재 시점의 사정에서 만약 ‘인륜적’인 이산가족 상봉을 실현시킨다면 북한으로서는 과거의 테러행위에 대해 제기될 수 있는 사과 요구를 외면하기 어렵다. 또한 사과를 한다면 모든 정책 초점을 맞추고 있는 미국에 굴복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마지못해서 테러를 규탄하는 성명을 내면서 얼마 후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공격은 반대한다는 의사를 밝히고 바로 그 뒤를 이어 남쪽에서 소수에 의한 공격 반대 시위가 있기는 했으나 면죄부를 받아 빠져나가기에는 막중한 현실적인 압력을 뒤집을 수 없는 난관에 봉착한 것이다. 더욱이 생화학무기가 북한에서 미국에 대한 테러의 배후로 지목된 오사마 빈 라덴 세력에 공급됐다는 설조차 분분한 판이다.

‘인륜’과 ‘테러’라는 양자간의 모순을 부각시키게 될 이산가족 상봉은 현 상황에서는 북한 존재의 정체성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히는 행사가 될 것이다. 이 점에서 김대중 정부가 미국의 대테러 전쟁에 대한 지원을 천명하고 나선 것도 면죄부를 받으면서 전복 전략을 지속하려는 북한의 의도에 중대한 차질을 가져왔다. 그러므로 테러전쟁이 지속되는 동안 이산가족 상봉은 어려울 것이며, 국제 여론이 분열되는 시점까지 북한은 기다릴 것이 확실해 보인다.

▼정부의 대북시각에 의구심▼

북한의 그러한 정체성 위기를 놓고 보면 김대중 정부가 근래에 보여준 일련의 행위들은 북한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그 시각에 의구심을 갖게 한다. 현충기념식에서 지금까지의 예를 벗어나서 현충탑을 등지고 기념식을 거행한 ‘상징적’ 행위, ‘6·25는 통일 시도’라는 발언, 일본인 납치범까지 우방의 요구를 무릅쓰고 장기수 송환에 포함시킨 것, 국가보안법에 걸려 있는 인사들을 8·15 방북단에 포함시킨 일, 그 일로 불신임된 사람을 즉각 핵심 요직에 다시 임명한 처사 등을 놓고 퇴역장군들이 분기한 것, 국회에서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한 발언이 나온 것, 그리고 정권의 정체성을 의심하는 정도의 의사가 표출된 것 등은 단순한 해프닝으로만 보아 넘기기에는 국가적으로 너무나 처참하고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동안의 햇볕정책은 테러사건으로 말미암아 불량국가를 지원해 준 결과가 되었고, 북한은 북한대로 인도적인 명목의 사업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쌍방이 모두 정체성의 문제에 당면한 지금, 이쪽만이라도 시원한 대답을 내놓기를 바라는 것이 국민의 바람이라는 점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전 국무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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