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반짝스타는 싫다 연기로 말할 뿐…" '흑수선' 이정재

  • 입력 2001년 10월 18일 18시 55분


3년전 이정재(28)와 정우성(28)이 함께 ‘태양은 없다’를 찍을 무렵의 에피소드 하나. 서울 마포에 있는 영화사에서 두 사람이 밖으로 나왔을 때 근처 여학생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와, 정우성이다!” 그리고 이정재를 보고 말했다. “이정재도 있네.”

그날 밤 이정재는 73년 소띠 동갑내기인 정우성과 술을 마시며 말했다. “지금은 분명히 네가 나보다 인기가 많다. 하지만 마흔 살쯤엔, 내가 더 좋은 연기를 할 수 있을 거야.”

충무로에서 이정재는 ‘스타’가 아닌 ‘배우’로서의 가능성이 점쳐지는 몇 안 되는 남자 배우다.

비슷한 또래의 주연급 배우 중 그만큼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도 드물다. 코미디(‘박대박’)부터 사극(‘이재수의 난’), 멜로(‘정사’‘선물’), 액션(‘태양은 없다’)에 이르기까지. 94년 ‘젊은 남자’로 데뷔한 이후 벌써 12편의 영화를 찍었다. 중국 출신의 세계적인 감독 첸 카이거가 만드는 ‘몽유도원도’의 주인공도 맡는다. 첸 감독은 “웃음 속에 선과 악이 공존하는 매력적인 얼굴”이라고 그를 평했다.

이정재는 다음달 9일 열리는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 ‘흑수선’에서 주인공 오 형사 역을 맡았다.

“멜로가 잘 안 되길래 일부러 한동안 멜로만 했는데, 이번에는 액션으로 이미지를 바꿔보고 싶었어요.”

‘흑수선’은 배창호 감독의 첫 블록버스터. 연쇄 살인사건을 통해 분단이 개인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다뤘다. 안성기, 정준호, 이미연이 출연한다. 영화에 대해 설명하다 말고 그는 싱긋 웃으며 덧붙였다. “이번에는 ‘영화 덕’ 좀 봐야죠.”

지금까지 그는 작품 운이 별로 없는 편이었다. 연기는 괜찮다는 평을 받기도 했지만, 그의 영화들은 대부분 흥행에서 재미를 못 봤다. 하긴, 작품 운이 없다고 할 수만은 없다. 스스로 그런 작품들만 골라 다녔으니까.

“배우로서 오래 가려면 여러 가지 역을 경험해 봐야 한다고 생각했죠. 흥행과 관계없이 연기력을 키울 수 있는 정극(正劇) 위주로 고르는 편입니다.”

스무 두 살 때, 그는 드라마 ‘모래시계’에서 말없는 보디가드 ‘백재희’ 역으로 잠시 ‘벼락스타’가 됐다. 하지만 이후 그의 행보는 ‘스타’의 모습을 지우고 ‘배우’로 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충분한 상품가치가 있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모래시계’의 백재희를 연상시키는 배역들은 일부러 피했다.

그는 요즘 쏟아져 나오는 ‘기획상품’ 같은 영화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고 한다.

“생각해보세요, 나중에 누군가 한국영화를 정리하는 책을 쓴다고 할 때 어떻게 평가받을 지. 산업적 측면에서도 의미가 컸던 ‘쉬리’는 한 페이지쯤 장식하겠죠. ‘공동경비구역 JSA’와 ‘친구’는 반 페이지쯤?하지만 ‘엽기적인 그녀’나 ‘조폭 마누라’는 어떨까요?”

영화 얘기를 시작으로 8학군, 쓰레기종량제 문제까지 다양한 얘기가 오갔다. 그의 주장은 잘 정돈이 되어 있었다.

담배를 피우는 그의 손가락이 가늘고 길었다. 흔히 말하는 ‘예술가형’. “혹시 악기를 다룰줄 아느냐”고 묻자 “감수성과 리듬감을 키울 겸해서 피아노와 트럼펫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아직은 ‘도레미’ 수준”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면 그는 배우의 ‘기본’을 닦기위해 상당한 노력을 하는 편이다. 새벽까지 술을 마시든, 밤샘 촬영을 하든 그는 운동도 거르지 않는다. 그와 함께 영화작업을 했던 누군가는 “정재는 벗겨놓으면 예술”이라고 했지만, 그는 “몸 관리는 배우의 기본”이라고 했다.

“서른 다섯 살 되면 제대로 된 연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 때쯤이면 눈빛도 더 깊어질 테고, 깊게 패인 주름도 한 두 개쯤 생기겠고. 연기한다는 느낌이 나지 않는 자연스런 연기를 하고 싶어요.”

서른 다섯 살의 ‘배우’, 이정재를 기대해본다.

<강수진기자>sjkang@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