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보는 보증잔액이 22조6000억원에 이르는 시중은행 규모의 금융기관. 그러나 ‘주먹구구 경영’에다 신보 돈을 쌈짓돈으로 취급하는 정부의 낙후된 인식까지 겹쳐 신보는 힘센 기관의 청탁이 난무하는 곳으로 전락했다. ‘신보 돈 못 떼먹으면 사기꾼도 아니다’는 말이 나올 정도.
▽‘떼이는 게 일’〓신보의 보고서 등에 따르면 올 7월까지 신보는 13조5912억원의 신규보증을 해줬고 5485억원을 보증사고로 대신 물어줬다. 대위변제비율이 4%에 이르는 셈이며 나중에 구상권을 행사해 되찾은 부분을 감안한 실질손실 기준으로도 3%가 넘는다. 지난해 일반은행권의 총여신대비 추정손실비율 0.74%와는 비교도 안 되게 높은 수치. 사정이 이렇다 보니 신보는 매년 5000억원에 가까운 순손실을 기록, 구멍난 재원을 국민세금으로 메우기 바쁘다.
신용보증기금 역대 이사장 및 감사 이사장 임명 전 경력 재임기간 이종성 재경부 국세심판소장 99.6∼현재 최수병 서울시 정무부시장 98.4∼ 이근영 한국투신 사장 96.8∼ 이정보 관세청 차장 95.9∼ 안공혁 보험감독원장 92.9∼ 김명호 한국은행 부총재 91.3∼ 감 사 김훈동 민주당 지구당위원장(현) 2001.10∼ 김건중 대통령 인수위원회 98.7∼ 김승규 경제기획원 감사관 95.4∼ 김익영 전매청 감사관 91.4∼ (자료:신용보증기금)
이렇게 떼이는 돈이 많은 것은 보증기관의 생명이라고 할 수 있는 신용평가와 내부통제가 느슨하기 때문. 대충 보증을 섰다가 사고가 나도 고의성만 없으면 그냥 넘어가는 것.
신보의 감사실 관계자는 “부도사고가 잇따르다 보니 일일이 관련 직원들을 징계하기도 어려운 상태”라고 털어놓았다. 일반 금융권이 결과에 따라 일벌백계하는 것에 비하면 하늘과 땅 차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이번 어음사기 사건 외에도 8월에는 생계형 창업자금이라며 신보로부터 5000만원까지의 대출을 받은 혐의로 34명이 구속되기도 했다.
▽고착된 낙하산인사〓매년 신보의 국정감사에서는 의원들의 매서운 부실추궁보다는 “왜 보증지원이 시원찮으냐”는 격려성 질의가 이어진다. 의원들의 민원해결 창구로 신보가 안성맞춤이기 때문. 이번 사건에 연루된 손용문 전무의 경우처럼 임원들이 암암리에 보증청탁에 나서는 것은 이 같은 외풍이 일상화된 결과다.
전통적으로 신보 감사자리는 여당인사 몫이었다. 농협에서 잔뼈가 굵은 현 김훈동 감사도 민주당 권선지역구 위원장 출신. 반면 이사장 자리는 재경부 몫으로 고착됐다. 낙하산으로 내려온 경영진이 신보의 경영합리성을 추구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신보의 한 관계자는 “외압성 보증청탁일수록 부실업체가 많다”며 “신보 부실화의 가장 큰 요인이 바로 외압성 보증”이라고 말했다.
▽재벌보증까지 담당〓신보는 97년 외환위기 이후 정부의 정책자금원으로 확실히 자리잡았다. 정부는 영세업체의 줄도산을 막기 위해 각종 특별보증사업을 신보에 맡기는 한편 세계적으로 유례가 드문 어음보험제도까지 만들어 신보에 독점 운영시켰다.
98년 대우 사태에 이어 지난해 ‘현대발 금융위기’가 표면화될 무렵 정부는 본격적으로 신보에 재벌의 부실여신을 떠안겨 ‘영세업체지원’이라는 당초 설립 취지마저 무색해진 상태다. 6월 말 현재 현대계열사에 대한 보증취급액만도 1조4510억원. 이는 특별보증 기본재산 2조1192억원의 68.5%에 해당하는 막대한 액수다. 이중 채무불이행 위험에 빠진 하이닉스반도체에 대한 여신지원액만도 2297억원.
<박래정·김승련기자>ecopar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