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 젊은이들은 이 땅을 떠날 채비에 나서고 있다. 지역간, 이익집단 간에는 네 탓이오의 비난과 공격이 난무한다. 낡은 이념 대립으로 사회의 밑뿌리가 좌우로 갈라지고 있다. 이것이 우리의 자화상이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됐는지 가늠조차 힘들 지경이다. 공동체의 내파(內破)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넘치는 것도 당연한 귀결이다. 더욱 절망적인 것은 위기를 돌파해줄 그 어떤 미더운 세력이나 지도자도 발견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결국 무망한 삶 속에서 남는 건 절망뿐이라 하겠다.
▼신뢰 더 무너지면 사회가 위험▼
그래도 우리는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만이 아니라 우리의 후손까지도 이 땅에서 삶을 살아내야 한다. 그러기에 아무리 복마전 같고 난마라 해도 우리는 그 속에서 희망의 실마리를 찾아야 할 것이다. 도대체 어디서 희망의 실마리를 찾아야 하는가.
언제부턴가 우리는 나를 제외한 그 누구도 믿지 않는 신뢰의 공황상태에 빠져들고 있다. 믿었던 지도자들이 하나같이 자신의 사익과 공익을 바꿔치기 하는 모습 앞에 국민들은 오직 나만을 믿는다는 고립주의의 토굴 속으로 움츠러들고 있는 것이다. 행위와 관계의 안정성과 지속성을 보장해주고 사회를 지탱해주는 신뢰체계에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이젠 완전히 깨지려 한다.
이것은, 사회의 갈등을 치유해야 할 정치인들, 생명을 다루는 전문가들, 국가의 백년대계를 책임진다는 교육자들, 공익을 본분으로 하는 공직자들, 정의의 칼자루를 쥔 법조인들, 사회의 목탁임을 자부하는 언론인들, 그 모든 사람들이 결국은 공익의 간판 뒤에서 자신의 이익을 취해온 걸 무수히 목격한 결과일 것이다. 모두가 공인을 가장한 사인뿐이라는 의심이 어느새 우리의 뼛속까지 스며들고 있는 것이다. 국민들은 너무 많이 속아 사회를 향한 신뢰의 그물을 거두어들이고 있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일의 관계를 맺어주는 근본적인 접착제는 신뢰이다. 우리 사회 위기의 진정한 뿌리는 신뢰의 위기이다. 신뢰의 위험이야말로 모든 위험의 근본이다.
신뢰를 보낸 대상으로부터 배반만을 당해온 국민들의 선택은 오직 나 자신과 내 가족의 생존을 위해 신뢰의 범위를 좁히는 길뿐이라고 생각한다.
나와 내 가족, 내 동네를 벗어나지 못하는 신뢰의 망으로는 공동체의 작은 문제조차 해결할 수 없다. 국가경제에 위기가 닥쳐도 나 몰라라하고, 환경이 위태하고 미래가 불안정해도 우리만 편하고 안전하면 그만이라는 생존논리가 점차 뿌리를 내려간다. 남의 잘못에는 가혹해지는 반면, 우리편의 잘못엔 관대해진다.
저 편의 뛰어남은 질시의 대상일 뿐이며, 우리의 아둔함은 한없는 포용의 대상이 된다. 내 편의 영원한 번영을 위해 상대의 싹을 잘라야 속이 시원해진다. 하나를 잃으면 전부를 잃게 되니 상대에겐 티끌조차 양보할 수 없다는 사고가 풍미한다. 이리하여 우리 사회는 개미와 벌만큼의 협동과 양보, 조화를 찾아보기 어려운 ‘제각각 뿔뿔이’의 사회로 변모되고 있다.
▼국민에 대한 배신 응징해야▼
이제 희망을 찾아 나서야 할 때다. 이 나라를 이끄는 자들이 우리에게 그 어떤 신뢰도 주지 못한다 해도 우리는 우리의 미래와 후손들의 앞날을 위해 이 사회의 신뢰를 일으켜 세워야 할 책무가 있다. 누가 그 일을 할 것인가. 바로 우리 자신들뿐이다. 먼저 우리 자신을 믿자. 그리고 우리의 믿음을 배신한 자들에게는 배신의 대가를 톡톡히 치르도록 하자. 국민에 대한 배신은 그에 대한 응징으로 갚아주자는 것이다. 그런 응징 위에서만이 새로운 신뢰의 망이 생겨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때서야 비로소 우리는 자신의 이익을 오로지 공동체의 운명에 녹여내는 진정한 공인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희망은 바로 우리 자신 속에만 있다고 하겠다.
심윤종(성균관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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