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재봉칼럼]테러전쟁, 이념대결 아니다

  • 입력 2001년 10월 31일 19시 09분


미국에 대한 테러에서 시작하여 전 세계가 그 영향을 받고 있는 현실은 전쟁과 평화라는 문제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명확한 상대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국가 간의 전쟁 개념에만 익숙해 있는 의식구조에 이번 테러사건은 역사적인 충격을 가한 것이 되었다. 그래서 21세기에 나타난 ‘새로운 전쟁’이라는 규정이 나오는 것도 이해할 만하다.

과학적으로 말하여 이것이 과연 전혀 새로운 전쟁양태로 규정할 수 있는가는 좀 더 두고 봐야 할 과제다. 그보다 지금 우리의 사고에 문제되는 것은 그 전쟁과 관련하여 해묵은 해석방식이 고개를 들고 있다는 데 있다. 그것은 이 전쟁을 제국주의에 대한 반제국주의의 지향으로 보는 것이다.

▼해묵은 해석방식은 잘못▼

니콜라이 레닌의 제국주의론의 망령은 아직도 일부에서 맥을 이어가고 있다. 독점자본주의에 의한 노골적인 제국주의론 대신에 근자에는 식민지를 보유하지 아니하는 제국주의가 지배하고 있다는 이론이 제법 정감적인 호응을 받고 있다. 구조적 불평등론 또는 ‘구조적 제국주의론’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외국의 자본가들이 값싼 후진국의 노동력을 착취하면서 얻은 이익을 현지에 재투자하지 않고 가져감으로써 국제적인 빈부의 격차를 심화시키는 결과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 이론에서는 산업국가와 비산업국가의 경제적 거래는 본연적으로 제국주의적인 것이라 하여 거부된다. 이런 이론이 전제로 삼고 있는 것은 모든 나라의 소수 통치계급은 대중을 억압하며, 후진국이나 개발도상국은 그러한 계급이익으로 구성되는 세계경제의 종속지역으로 전락하고 선진국의 지배계급은 종속지역의 소수 지배계급의 이익과 결탁한다는 것이다.

얼핏 이런 이론은 복잡한 현실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의 욕구를 충족시킴으로써 호소력을 갖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이론은 사실과는 동떨어진 것이다. 후진지역의 경제적 빈곤과 부패를 전적으로 탐욕스러운 서방 자본주의의 착취에 책임을 돌림으로써 후진지역의 현실과 그 주민의 요소는 무시하며 나아가 그들의 국가로서의 자존심과 사람으로서의 구실조차 이데올로기적인 안개 속에 묻어버리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정치적 요인의 중요성은 거의 완전히 빼버리는 것이다.

한때 후진국이었던 일본이 세계적인 산업국가로 등장하고, 과거에 세계를 휘어잡았던 영국이 쇠락한 것은 이런 이론으로는 설명되지 않을뿐더러, 20세기 후반에 들어 한국을 포함하여 만성적인 후진국들이었던 아시아 국가들이 자본주의 경제로 강력하게 탈바꿈한 사실 등은 그런 이론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적인 착취만 없으면 풍요와 평등이 보장된다던 사회주의 국가들이 형편없는 빈곤과 파탄에 이른 것은 더더욱 해석이 되지 않는다.

가깝게는 북한이 오늘날 저 모양이 된 것이 자본주의 세계와의 거래 때문이 아니라 내부의 정치적 요인 때문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또한 근자에 들어 한국이 이른바 ‘외환위기’를 맞은 것이나 지금의 경제적 난관이 세계적 자본주의의 착취 때문이었다고 말한다면 이는 하늘을 손바닥으로 가리는 것과 같은 비현실적인 생각일 수밖에 없다.

▼'문명의 충돌'과도 달라▼

지금 테러사태를 놓고, 테러는 반대한다고 하면서 테러가 발생하게 된 근본원인이 세계적 자본주의의 탓이라고 말하는 것은 대단히 비현실적인 분석이다. 중국이 체제를 정비하여 자본주의적인 발전을 이룩하면서 세계무역기구에 가입하려 한 노력과 북한이 자본주의적인 국제 경제기구에 못 들어가서 안달하는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그런가 하면 테러전쟁을 놓고 ‘문명의 충돌’이라고 말하는 것도 기이한 소견이다. 탈냉전 이후에 신보수주의가 새로운 적을 찾아 만들어낸 이 이론도 이슬람과 유교권에서는 대단히 자존심 상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국제정치의 현실과 지향을 섣부른 역사철학으로 색칠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좌우의 국제적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지금 한국의 어려움은 극복되기 어려운 상황이라 아니할 수 없다.

(전 국무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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