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에 의해 우주를 지배하는 원리를 규명하려 했던 파우스트. 왕성한 지적 활동에도 불구하고 지식의 무력함 앞에서 절망하던 그는 자신의 앞에 나타난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와 거래를 하게 된다. 현세의 쾌락을 즐기는 대신 악마에게 영혼을 팔기로….
대학이 신성한 것은 항상 이런 파우스트적 거래를 경계하며, 모든 다른 욕망을 억제하는 대신 진리를 엿볼 기회를 갖기로 한 신과의 약속을 지키려 애쓰는 곳이기 때문이다.
빙엄턴대의 이매뉴얼 월러스틴, MIT대 노엄 촘스키, 보스턴대 하워드 진 교수 등 미국의 저명한 지식인들이 저술한 이 책(원제:Cold War and The University)은 냉전시대에 미국 대학에서 행해졌던 파우스트적 거래를 파헤쳤다.
이 책의 목적은 냉전시기 동안 정부의 학문연구 지원정책의 변화가 어떻게 연구활동을 결정하고 변화시켰는가를 밝히고, 이를 통해 학문연구가 냉전시대의 굴레를 벗어나 진정한 진리를 추구하는 정상적 상태로 돌아가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냉전시기 동안 파우스트적 거래에도 채찍과 당근이라는 전통적 방법이 사용됐다. 1950년대 미국을 휩쓴 매커시즘의 광기는 채찍의 전형이었다. 대학은 학문적 자유의 방어진지임을 선언했지만 대학당국은 정치적 압력 앞에 굴복했고 그 결과 많은 교수들이 대학에서 쫓겨났다.
당시 예일대의 C 세이모어 총장은 정부 통제로부터 대학의 독립을 확보하는 방책의 일환으로 공산주의자는 채용하지 않을 것이며 행정관리 한 명을 FBI의 학내 연락담당자로 임명한다는 정책을 설명하면서 말했다. “예일에서는 마녀사냥 같은 것은 절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일에는 마녀가 발을 들여놓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채찍 못지 않게 강력한 힘을 발휘한 것은 당근이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1950년 한 해 동안 미국의 군사예산은 130억 달러에서 540억 달러로 급증했고 그후 10년 동안 GNP의 10%를 상회했다. 이런 군사비 지출은 그후 40년 동안 경제성장의 추진력이 됐을 뿐 아니라, 고등교육의 든든한 재원이 되어 대학을 냉전체제 유지를 위한 과학기술과 이데올로기의 생산기지로 만들었다.
궁핍한 처지에서 고학으로 공부를 하던 각 분야의 대학원생들은 수업료를 완전히 면제받고 특별연구비나 연구장려금의 제안을 받게 됐다. 기성학자들은 거액의 돈을 대학으로 끌어들이는 역할을 담당하게 되는 동시에,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대학을 선택할 수 있게 됐다.
이제 냉전은 끝났다. 하지만 아직도 냉전시대의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대학에서 미국의 지식인들은 말한다. “정치사의 ‘개입의 40년’이 종식될 수 없다면, 학문연구의 재건 또한 불가능하다.”
<김형찬기자>kh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