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가난했지만 따뜻한 추억 '죽은 별을 건지는 사랑'

  • 입력 2001년 11월 23일 18시 53분


◇ 뜰채로 죽은 별을 건지는 사랑/반칠환 시집/109쪽 5500원 시와시학사

동네 이발관에는 돼지그림이 걸려 있었다. 새끼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어미 젖을 빠는. ‘바리깡’에 머리를 맡기고 그림속 글씨를 골똘히 봤었다. ‘희망’이라고 적힌.

이런 그림을 ‘키치화(畵)’라고 폼나게 말할 수 있게 된 나이. 돌아보면 ‘이발소 그림’같은 가난한 추억이 우리를 멈추게 만든다. 멈추게 한 그 힘으로 다시 걷는 힘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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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칠환씨(37)의 첫 시집을 읽으면서 돼지그림 속의 ‘희망’을 떠올렸다. 촌각을 다투며 사는 우리에게 ‘멈춤’의 힘을 주는 추억에 대하여.

사념(私念)으로 난해한 관념시의 숲에서 그의 언어는 청량해서 도드라진다. 입가를 빙긋이 만들기도 하다가, 눈시울을 뜨듯하게 달구기도 한다. 굳건히 두 발을 땅에 디딘 시인이 읽는 이의 마음을 움직인다.

“충청도 산골 촌놈” 출신인 반씨는 추억의 편린을 질박한 시어로 찰칵, 찍어서 보여준다. “내남 없이 주려 넘던 보릿고개였으나 사발입보다도 형제들 목구녕이 턱없이 크게 벌어지던 시절”이었다. 농사와 묵장사로 집안을 건사한 “억척스럽고 총명했던 에미”와 “양푼 그득 수제빌” 먹고 까르르 웃던 감자알 같은 형제들….

가난했으되 따스했던 그의 기억들은 도회지 유민들이 함께 나눌 수 있는 마음의 곳간이다. 얼굴이 까매진 어머니가 “자식 매꺼놓고 얼굴도 안 비춘다고, 선상님이 속으로 욕하신다”며 물바랜 옥색치마 차려입고 부득부득 학교를 찾을 때의 곤란함이 비단 시인만의 기억일까.

급작스럽게 가정방문한 선생님을 맞으러 열무밭 매다 말고 한달음에 달려오는 어머니의 폼새는 어떻고.

“감물 든 큰성 난닝구에, 고무줄 헐건 몸뻬바지 넥타이 허리띠로 동여매고, 동 방위 받는 시쩨 성 깜장색 훈련화 고쳐신고 달려오시는데 조자룡이 헌창쓰듯 흙 묻은 손엔 호멩이는 왜 들고 나오시나.”(‘가정방문’ 중)

하지만 어린이날 선물로 막걸리를 받아와서 방위병 막내아들에게 “빙그레 웃으며 빈 스뎅그릇 내미시는”(‘어린이날’) 것이 사랑이었음을 안다. 그렇지만 이제 그녀는 “따신물 나오구, 즌깃불 환하지, 테레비 잘 나오지 … 이제 고생 다 끝냈시유”라며 호강을 자랑하지만 “실은 먼산 바라기 (…) 종일 할 일이 없다.”(‘어머니4’ 중)

이제는 추억의 따스함이란 “사라진 동화 마을” 같은 것이지만 시인은 현대의 강팍한 세상을 향해 핏대를 세우지 않는다. “억울함이 연료인” 세상을 걱정하면서도 반어나 역설이 가진 해학을 잃지 않으니.

“삼급수에서 비닐 봉다리 뒤집어쓴 용이 승천하길 바라”는 “불순한 상상”을 금하고 (‘사라진 동화 마을’ 중), “맥도널드 햄버거에 우리밀 빵을 함께 먹은 탓”에 배탈이 들면서도 “세계화 시대에 편협한 국수주의 내장”을 탓한다.(‘다국적 똥’ 중)

하지만 “뜰채로 죽은 별을 건지는” 시인은 소년처럼 “그날”을 고대한다.

“아빠, 그날이 오면 / 누군가 까만 하늘밭 까맣게 갈아 / 황금빛 옥수수알 넓게 뿌리고 / 나는 맨발로 별똥을 주워도 되겠지?”(‘그날이 오면’ 중)

<윤정훈기자>diga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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