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년간 박혜란 아줌마(55)에겐 썩 좋지 않은 일이 많았다. 남편의 사업실패가 있었고 맏언니같던 큰동서가 먼저 갔다. 큰동서 49재날 친정 어머니가 돌아 가셔서 임종도 못했다. 무엇보다 큰 사건은 자궁과 난소를 들어낸 일이었다. 그녀는 인생이 예측가능하다고 믿었다. 삶 곳곳에 놓였다는 함정은 남의 것이라 생각했었다. 서울대를 나왔고 한때 유수의 잡지사에서 기자생활을 했으며 아들 셋을 모두 서울대에 보낸 유명한 엄마이자 잘 나가는 여성학자. 그 똑똑하고 남부러울 것 없어 보이던 이 여자에게도 남에게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늙었다. 이제 늙었다. 그런데 나이들고 몸이 안 좋아지니 세상보는 눈이 바뀌더란다. 박씨가 이번에 낸 수필집 ‘나이듦에 대하여’는 지난 2년간 자신을 둘러싼 일상을 토대로 쓴 생활 에세이다. 그녀는 기자와 만나 마치 옆집 아줌마처럼 나지막하면서도 힘있는 목소리로 수다를 풀어냈다.
“아줌마들 3대 질병이 자궁 허리병 홧병이야. 이번에 자궁 수술하면서 보니까 왜 그리 ‘빈궁마마’들이 많은지. 산후조리 잘못해서 허리병은 기본이고 고부관계가 주 원인인 홧병은 결혼 10년차나 40년차나 똑같애. 여자가 남자보다 오래 산다 하지만 여자들은 죽을 때까지 병끼고 산다고 보면 돼.”
그녀의 글 곳곳에는 신산(辛酸)한 삶을 살았던 이 땅의 50, 60대 아줌마들의 얘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우리의 삶은 대하 드라마다. 해방 전쟁 가난…그속에서 애낳고 남편 뒷바라지하고 시부모 모시고 살았다. 그러나 훌쩍 늙어버린 지금, 자식들과는 아예 대화가 안 된다. 환갑이 넘어서까지 80 ,90 넘은 시부모 모셔야 하느냐 한탄하면 효자로 소문난 남편은 일상적인 히스테리라며 무시해 버린다. 너그러운 시어머니이고 싶지만 요즘 젊은 것들은 해도 너무한다. 남편은 또 어떤가, 왕년에 출세를 했건 말건 제 손으로 라면하나 끓여 먹을 줄 모르는 생활 무능력자들. 오죽하면 팔자좋은 60대 여자는 유산많이 남기고 남편이 일찍 죽은 년이란 농담까지 나왔을까.’
박씨도 요즘 은퇴한 남편과 함께 지낸다고 한다. 그렇게 학수고대하던 제2의 신혼. 잉꼬는 못돼도 비둘기는 될 줄 알았는데 그게 맘대로 안된단다.
‘남편이 너무 낯설다. 그는 내가 알고 있던 남자가 아니다. 너무 시시해서 말하기도 창피한, 점심에 라면 끓여 먹을까 빵 먹을까 이런 것 같고도 금방 기싸움으로 발전한다.’
그러나 그녀의 힘은 이런 중년의 투정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녀의 글 곳곳에는 아직도 세상에 궁금한 것이 많은 젊은 정신이 도사리고 있다. 스스로 경험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지혜와 자신감이 배어있다. 그리하여 오직 젊음만이 찬미되는 이 시대에, 늙음은 추하고 악하고 약함이라고 무시당하는 이 시대에 그녀는 내적으로 성숙한 어른만이 들려줄 수 있는 관용과 여유를 담아냈다.
‘사랑도 미움도 다 날려 버리고 그저 그냥 함께 사는 남편이 괜찮아 보일 때가 많다. 좀 썰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내 남편이 정치인도 아니고 고관대작도 아니고 재벌도 아니라는 게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돈이나 권력은 너무 많아도 불행에 가깝다.…그렇다고 다음 세상에서 지금 남편을 또 만나고 싶으냐는 질문은 사절.’
‘산다는 것 자체가 늙어 가는 것이다. 우리는 늙음을 맹렬히 부정하느라고 정작 어떻게 늙을 것인가에 대한 준비는 못했다. 하지만 노전(老前)이 따로 없듯 노후(老後)도 따로 없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곁을 떠나도 남은 자의 삶은 지속된다. 왜 사느냐는 물음은 필요없다. 그냥 살아가는 것일 뿐.’
‘몇살에는 결혼을 몇 살에는 출산을 하는 식으로 나는 나이에 맞춘 삶을 살았다. 그러다 어떻게 나이를 먹을지 생각하며 살자고 서른아홉에 대학원 들어가 공부한다 강연한다 원고쓴다 살림한다 정말 열심히 살았다. 쉰 넘으니 몸이 말을 걸어왔다. 몸의 말에 귀를 기울이다 보니 이제야 나이듦을 똑바로 쳐다볼 수 있는 눈을 얻었다.’
박씨의 글들은 지난 98년 중반부터 최근까지 여성신문에 게재됐다. 친구들은 ‘나이든게 뭐 자랑이라고 떠들어대냐’고 타박을 주었지만 오히려 10대 소녀들이 재미있다고 동감을 표시해와 놀랐다고 한다. 창피하고 쑥스럽지만 먼저 산 여자 선배로서 그들이 앞으로 살아나갈 삶에 뭔가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여 ‘감히’ 책으로 묶어 냈다고 한다.
<허문명기자>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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