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프리즘]차병직/범인만 있고 사건은 없다?

  • 입력 2001년 12월 4일 18시 24분


체코의 소설가 카렐 차페크의 단편들을 가려 묶은 책은 ‘단지 조금 이상한 사람들’이다. 이 책의 짧은 이야기들 속에는 진지한 고민이 기지와 함께 섞여 있다. 이상한 사람들이 찾아 헤매는 것은 진실이다. ‘늙은 죄수 이야기’도 그 중 하나다. 물건을 도난 당한 피해자가 도둑을 잡으려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도둑이 자기가 훔친 물건의 주인을 찾아 나섰다. 그런가 하면 살인자는 존재하는데 살인사건은 찾지 못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경찰은 고민 끝에 살인자 없는 피살자를 찾아 꿰어 맞추려 하나 살인자는 자기 사건을 찾아달라고 요구한다. 이런 이야기들이 예닐곱 쪽에 얽혀 있다.

소설 밖으로 뛰쳐나와 봐도 이상하긴 매한가지다. 공적자금 손실액이 139조원에 이른다고 한다. 원금, 이자, 기회비용 등을 계산한 것이 내년 세수 총액을 넘어선다. 엄청난 피해의 결과가 존재하는데도 언뜻 그 피해자가 누군지 떠오르지 않는다. 애당초 공적(公的) 자금이란 용어가 낯설기도 했지만, 그 돈은 끝내 공적(空的) 자금이 되어 주인을 찾아 사라져 버린 모양이다. 아니면 피해자들이 쫓아오기 전에 피해 버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막대한 액수의 피해자가 모든 국민일 땐 피해자가 누군지 특정되지 않을 수도 있겠다.

▼이용호-진승현사건 오리무중▼

반대의 경우도 널려 있다. 이용호씨 주가조작 사건에서 의심스러운 자금으로 불법의 돈을 만들어내고, 그 돈을 다시 부당하게 배분한 사실이 드러났다. 이씨는 검은 돈을 추잡하게 다룬 범죄자 혐의를 받고 있다. 그런데 검은 돈에 얽힌 추잡한 사건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이 뇌물이건 위법한 정치자금이건, 거래한 사람을 찾아내지 못한다. 범죄자는 있는데 범죄 사건은 없는 꼴이다. 검찰에서 이미 수사를 해놓고 난 뒤 방관하고 있는데 특별검사라고 찾아낼 수 있을까.

진승현씨 사건도 다를 바가 없다. 전 국가정보원 차장과 과장이 걸려들었지만 그 끈이 어디서 끊어졌는지 지금 우리는 알지 못한다. 이 의문을 검사가 풀어줄지, 기자가 풀어줄지 궁금할 뿐이다.

놀라운 것은, 이런 이상한 모습들을 보며 이상한 생각을 하다보니 세계로 눈을 돌려도 이상한 일뿐이다. 아프가니스탄 북부동맹군이 미국과 영국의 도움을 받아 아프간 북부 칼라이장히 수용소에서 탈레반군 포로들을 사살했다. 그 참혹한 폐허 속에서 80명이 동료들의 시체를 방패삼아 살아 있었다. 1주일 뒤 발견된 그들은 살아 있다고 보기엔 너무나 창백하고, 죽었다고 판단하기엔 눈동자에서 슬픔과 분노가 번져 나온다.

그것은 또 하나 인권 유린의 현장이다. 인류가 다시는 되풀이하지 말자고 다짐했던 과거를 거듭 재현하고 있다. 위법이란 말로 설명하기엔 터무니없이 부족한 이 사건의 범죄자는 누구인가. 미국인가, 아니면 우리 모두인가.

이 사건의 범인을 얼른 지목해 내지 못하는 것은, 미국이 사태를 논리적으로 호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 저지르고 있는 이 행위를 범죄가 아니라 범죄자에 대한 형벌의 집행이라고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유엔과 국제인권단체의 진상 조사 요구에 부정적 태도를 분명히 한다. 미국인들에게 시민자유권을 제한할 수 있음을 알리고, 외국인들에겐 미국시민권을 현상품으로 내건다.

▼아프간戰 참상 진실은…▼

꼬마들조차 전자오락기에서 십자조준기에 걸려든 목표물을 단추 하나로 쉽게 폭파하는 것을 현실에 적용하길 바라지는 않는다. 사형제도가 필요하듯 복수도 제 나름의 가치가 있다고 믿는 자에겐, 한계를 넘어서는 응징이 양심에까지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 모양이다. 그 논리로 다시 폭탄자살과 이스라엘 반격이 뒤따른다.

이렇게 우리는 국내외적으로 의혹의 덩어리 속에서 살고 있다. 그래서 항상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걷는다. 이상한 세상에서 이상한 일들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바로 이상한 사람들이다. 우리가 고개를 약간 갸우뚱거린 채 걸어가려는 길은 진실로 향해 있다. 그 진실은 그렇게 거창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호기심을 달래줄 정도로 사실이 밝혀지고, 벌어진 사실에 대해서는 수긍할 수 있는 이유가 제시되면 된다. 완전히 투명한 진실을 원하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다. 완전한 진실은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만큼 세상은 이상하다. 그래서 새해에 이어갈 우리의 숙제로 이 이야기를 던진다.

차병직(변호사·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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