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것이 오늘을 사는 보통사람들의 생각이 아닌가 한다. 60∼70년대 청년시인 김지하는 당대의 국부 창출을 내건 중상주의의 비정함을 용납할 수 없었다. 시인의 따뜻한 마음으로 매일매일 접하는 아직 개발의 혜택이 미치지 못한, 가난이 덕지덕지 묻은 이웃들의 아픔을 차마 볼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는 ‘타는 목마름으로’, 휴머니즘이 바탕된 경제개발과 체제운영을 갈구했다. 그는 그시대 주류와 불화했던 것이다. 60∼70 년대만 해도 집권자나 그 반대편에 있는자나 모두 진지했다고 본다.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 삶인가? 경제개발은 왜 하는가? 민주주의의 전제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정책의 우선순위는 어떻게 정해야하나? 복지는 언제쯤 가능한가? 이런 것들이 주된 고민이었다. 그러나 80,90년대에 우리는 양분됐다.
예술에서조차 휴머니즘이 사라졌고 원하든 원치 않든 중간자란 용납되지 않았다. 이문열의 ‘시대와의 불화’(자유문학사,1992년刊)는 시(詩)가 구호가 되고, 그림이 전투적으로 변해 가는 상황에서 태어난 것이라 생각된다.
위장된 휴머니즘으로, 이상을 이야기하고 있으나 승리를 위한 전략과 전술만 남은 양편의 다툼에 우리 모두는 지쳐있었다. 그는 당대를 압도하던 가치들을 ‘유행하는 진리’로 규정하고, 분투했다.
아마도, 이문열은 시와 그림과 소설조차도 민중주의에 복무해야 한다는 주장에 전율하고 숨막혀 했던 것 같다. 지난 50년 동안, 우리 기업인들이 불화할 수 밖에 없었던 대상은 근로자의 임금인상, 고용보장 요구가 아니라 기업인에 대한 차가운 인식이었다. 그러나 대부분 기업인은 건전하다. 지금, 우리 기업인들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사회의 따뜻한 시선이다.
우리 경제가 어렵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해낼 수 있다. 노벨 경제학수상자인 사무엘슨 교수와 후쿠야마 교수의 아픈 지적처럼 포퓰리즘을 경계하고 정직성을 회복하여 저신뢰사회에서 벗어나면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다.
60년대 1인당 GNP가 80달러에 불과했던 것을 90년대에 8,000달러선으로 이끌어올리지 않았는가? 따뜻한 평가만이 우리 경제계에 건강한 기업인을 돌아오게 할 수 있다.
진정한 휴머니스트는 어렵고 힘들어하는 사람을 위해 눈물 흘리는 사람이 아니라, 땀을 흘리는 사람이 아니겠는가?
(현대카드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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