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일민예술상 수상 임권택감독 "한국인만의 영화만들고파"

  • 입력 2001년 12월 18일 14시 17분


오전 6시. 임권택 감독은 이 시간에 경기도 양수리 촬영 현장에 있었다.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는 그는 오늘도 어김없이 일찍부터 촬영 현장을 지키고 있었다. 45년간 줄곧 그래왔듯이.

임권택 감독(65). 한민족의 정한(情恨)의 세계를 그려온 임감독이 제6회 일민예술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그는 “일민상은 영화 말고도 문화 예술 전 분야를 대상으로 하는 것으로 아는데, 이렇게 큰 상을 내가 타게 돼서 어리둥절하기도 하다” 고 소감을 말했다.

일민예술상은 동아일보사 명예 회장이었던 고(故) 일민 김상만(一民 金相万) 선생의 뜻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상. 일민문화재단이 매년 업적이 뛰어난 문화 예술인 1명을 선정해 수여한다.

임감독은 설명이 필요없는 한국 영화계의 거목(巨木)이다. 한국 영화 사상 최초로 관객 100만명 돌파(1993년· 서편제 ), 한국 감독 최초로 해외 영화제 감독상 수상(1993년·제1회 중국상해국제영화제), 한국 감독 최초로 칸 국제영화제 본선 진출(2000년· 춘향뎐 ) 등.

이처럼 한국 영화의 자존심 ‘예술 영화의 거장’ 으로 인정받는 그는 60년대에는 제작자의 주문에 따라 오락 영화를 생산 하던 ‘다작(多作) 감독’ 이었다. 그러고보니 요즘 촬영중인 ‘취화선’ 이 무려 98번째 작품이라는 사실이 새삼 떠올랐다.

“젊었을 때 ‘저질 영화’ 를 많이 찍었지.(웃음) 저급한 취향의 영화만 찍으며 한 10년쯤 허송세월 했어요. 그런 영화만 찍다보니 막상 진지하게 영화를 만들어보려 해도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죠.”

액션, 전쟁물, 멜로, 사극, 심지어 코미디와 스포츠영화까지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섭렵하며 3년동안 23편의 영화를 만들기도 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이런 경험이 임감독의 오늘에 밑거름이 된 것도 부인할 수 없다.

전남 장성 출신인 임감독은 20세에 우연히 정창화감독 밑에서 소도구 조수일을 하면서 영화와 인연을 맺었다. 정감독 밑에서 조명조수와 조감독을 거쳐 62년 액션영화 ‘두만강아, 잘있거라 ’로 데뷔했다. 25세 때였다.

73년 제작과 감독을 겸했던 잡초 부터 그의 영화세계는 달라지기 시작, 80년대 만다라 등을 거쳐 지금의 모습으로 자리잡았다. 그와 더불어 충무로의 ‘황금트리오’ 라 불리는 이태원 태흥영화사 사장과 정일성 촬영감독을 만난 것도 행운이었다. ‘황금트리오’ 가 터트린 대박 문화 상품 인 서편제 는 그가 꼽는 자신의 대표작이기도 하다. ‘서편제’ 는 그가 감독으로서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영화다. 그는 “한국인이 아니면 만들 수 없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 고 말한다.

“영화는 대중 매체지만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이 큽니다. 영화인들은 항상 이 점을 고민하며 영화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 영향력을 밝고 건강한 쪽으로 기여하도록 해야죠. 요즘 한국 영화가 너도나도 조폭영화와 ‘돈버는 영화’ 로만 몰리는 것 같아 걱정이 됩니다”

임감독은 마흔셋이라는 늦은 나이에 결혼, 두 아들을 뒀다. 그의 부인은 한때 그가 ‘채령’ 이라는 예명을 지어줬던 영화 배우 출신인 채혜숙씨. 아들 동준과 동재는 각각 동국대, 단국대 연극영화과에 재학중이다. 그는 “아이들이 애비를 따라잡는 게 힘들다는 것을 아는 것 같은데, 글쎄 어떻게 할지 모르겠다” 며 웃었다.

노감독이 지금 가장 바라는 소망은 무엇일까. 그는 1998년 샌프란시스코국제영화제에서 평생공로상을 받은 뒤 밝혔던 소감으로 그 대답을 대신했다.

“지구라는 커다란 꽃밭이 있다면, 영화라는 매체도 이 꽃밭을 아름답게 가꾸는데 한몫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영화 감독으로서 나는 우리 고유의 문화적 개성으로 세계라는 큰 꽃밭의 한 작은 꽃이 되고 싶습니다.”

<강수진기자>sjk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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