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Report]'코알라' 박희정 휴먼스토리

  • 입력 2001년 12월 20일 14시 34분


94년 단지 '골프가 좋다'는 이유만으로 호주로 골프유학을 떠났던 박희정(22 호주명 글로리아 박). 그런 그녀가 드디어 미국 LPGA에서 2년만에 정상에 오르며 상금랭킹 33위로 뛰어 올랐다. 김미현에 이어 한국선수로는 6번째 세계정상을 차지했을며 내년도 4대 메이저대회 출전권도 따냈다. 그리고 지난 국내 대회인 SBS프로 최강전에서도 우승하며 국내 팬들에게 유감없는 기량을 보여주었다.

"오랜만의 우승으로 기쁘기도 하지만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하는 박희정은 요즈음 일산에서 가족과 함께 모처럼의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실력으로 모든 평가를 받겠다는 강한 집념으로 최고에 우뚝선'코알라' 박희정,그녀를 만나봐았다.

"나의 1승은 어즈 누구의 10승보다 값지다고 생각해요"

법학을 전공한 아버지 박승철씨와 어머니 유혜숙씨와의 무남독녀인 박희정은 번동중학교 2학년 시절 아버지를 따라 갔던 골프연습장에서 처음 골프를 접했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전교회장을 지냈고 중학교 시절에는 서울지역 모의고사에서도 등수 안에 들 정도로 학업성적이 좋았던 박희정이 컴퓨터 대신 골프채를 선택한 게기가 된느 순간 이었다.골프를 시작하기 전까지는 운동신경도 없고 운동선수가 되겠다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대부터 하루 1천여개의 볼을 때리며 골퍼로서의 꿈을 키웠고 골프채를 잡은 지 6개월 정도가 지난 후 골프를 시키려면 차라리 골프강국으로 건너가자는 가족들의 의견 끝에 호주로 향했다. 체계적인 레슨을 받을 수 있고 골프코스에서 365일 연습할 수 있는 유혹이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강한 정신력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호주유학 선택

호주 유학생이 된 박희정은 영어와 골프이외에는 담을 쌓았다. 낯선 환경과 언어소통이 자유롭지 못한탓도 있었지만 자신을 위해 호주까지 날라온 가족들을 실망시킬 수 없었고 무엇이든 시작하면 최고가 되어야 하는 그녀의 가한 정신력이 그녀를 채찍질했던 것이다. 그 노력은 6개월만에 스트라스 필드CC의 그럽챔피언으로 결실을 보기 시작햇는데 이때 ㄱ클럽 챔피언에 오르자 이 클럽 관계자들은 물론 당시 호주 교민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1년뒤, 맥도널드 칼리지에 입학해서도 박희정은 수업과 골프를 병행했다. 지도는 호주 골프국가대표코지가 맡아주었는데 박희정이 호주를 택했던 이유처럼 프로그램대로 체계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성장하면서 체격도 좋아졌고 아울러 잠재된 기량도 서서히 나타나 96년부터는 성적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

'96 전호주아마투어골프대회에서 15세의 어린 나이에 주니어부를 제패하며'호주의 영웅' 캐리 웹이 갖고 있던 16세 우승 기록을 깨뜨리는 기염을 토했다. 유학생이라는 이유로 월등한 기량에도 불구하고 호주대표팀에 합류하지 못했으나 현지 언론들이 박희정을 대표선수로 만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주어 94년 골프유학을 떠난지 2년만에 호주 골프국가대표로 발탁되며 호주 골프계의 신데렐라로 떠올랐다. 96년 말에는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전호주 주니어 최우수 선수상을 받기도 하며 최고의 자리를 지켜나갔다.

97년에는 전호주 아마추어골프선수권대회에서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우승의 쾌거를 올렸다. 이는 한국골프사상 처음으로 골프선진국인 미국이나 유럽,호주 등에서 내셔널 타이틀을 차지한 최초의 금자탑이다. 또한 98년 호주 주니어선수권대회에서 3연패에 성공,호주 골프사상 최초의 쾌거를 기록하기도 했다. 이3연패는 호주의 캐리 웹 등 가라성 같은 대선수들도 이루지 못한 것으로 현지 언론에서 특집을 다룰정도로 지대한 관심ㅇ르 보이기도 했다.

이렇듯 호성적으로 거칠 것이 없었던 박희정은 호주 유학시절 모든 시합에 소요되는 항공료, 숙박비,캐디비용,용돈까지의 모든 경비를 협회로부터 공식적으로 지원 받기도 한 최초의 동양인으로서 한국의 위상을 호주에 새롭게 심기도 했다. 그러나 그 동안,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승승장구를 하던 그녀에게 언제나 순탄함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호주인이 대부분인 골프클럽에서는 아시아인인 박희정이 두각을 나타내는 모습을 곱게만 보지는 않고 시샘의 눈길로 그녀를 냉대해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너엇던것이다.멸시는 물론 방해까지 일삼는 겨7ㅇ우도 많았는데 대회에서 조를 짤 때 실력이 한 수 아래인 서수와 함께 배정함으로써 좋은 점수를 내지 못하게 하기도 했다. 또 한 가지는 박희정이 입는 반바지까지도 문제를 삼는 사람들까지 나타나 어린 마음을 아프게 했는데 지금도 그 사람들을 생각하면 '마귀할멈'이 생각날 정도란다.

"골프가좋기도 하지만 경기당일 성적은 정신력에 달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며칠간 계속 시합을 하다보면 대부분의 선수들이 체력에 한계를 느끼는데 저도 마찬가지지만 호주인들에게서 느껴지는 차가움도 이겨내야 한다는 정신력으로 버텼습니다.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경기에 집중하다 보니 시합이 끝나면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이방인으로서 겪는 어려움은 스스로를 강하게 만들어 박희정의 장기는 아버지를 닮은 167cm, 70kg의 당당한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호쾌한 드라이브 샷. 호주 유학시절에도 호쾌한 장타로 인해'존 달순'(존 댈리의 한국식 여자 이름)이라 불리기도 했던 그녀는 40kg짜리 역기를 자유자재로 다룰 정도로 근육이 탄탄한데다 백스윙때 하체가 정지된 상태에서 어깨가 90도 이상 돌아갈 정도의 유연성을 바탕으로 장타를 뽐내고 있다. 지난 97년 유학 후 3년 반만에 처음으로 고국무대를 박ㅂ았던 필라여자오픈에서 평균 비거리 250야드를 넘나드는 장타를 매일 페어웨이 중앙에 떨어뜨려 갤러리들의 탄성을 자아내게 한 바 있다.

장기는 두 가지를 가질 수 없지만 박희정은 바람의 변화가 심한 호주의 링크스코스에서 갈고 닦은 아이언샷도 정교하다. 특히 3,4번 롱아이언샷은 그 정확도가 타의 추종을 불허해 거리가 생명인 프로들에게 있어서 강한 장점을 작용하고 있다. 아직 숏게임이 미숙한 것이 흠으로 70야드 이내의 숏게임에 주력하고 있고 퍼팅에도 많은 시간을 쏟고 있다. 박희정의 목표는 메이저대회 우승과 명예의 전당에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올라보는 것. 그리고 이른 감은 있지만 은퇴 후에는 미LPGA협회에서 후배들을 위한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싶다고 말한다."선배들이 볼 때는 좀 건방져 보인다고 할 수는 있지만 일단 목표가 설정됐으니 최선을 다해 저를 아는 분들에게 실망을 안겨드리지 않도록 할 생각입니다."처음 유학 실에 올랐을 땐 영어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공부할 시간도 부녹했다는 박희정은 그럴수록 골프실력을 ㅗ이겨야 한다고 다짐하곤 했다. 연습을 끝내고 밤에 집으로 돌아오면 박희정은 소설책을 읽으며 라디오를 듣는 것이 유일한 취미였다고 한다. 지금의 자신이 이 자리에 설 수 있엇던 것은 많은 가족들의 헌신과 주변 분들의 가까운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말하며 이자리에서 열거하면 2페이지는 꽉 채우고도 남을 것이란다. 그리고 앞으로도 열심히 노력해서 최고의 선수가 되겠다는 말을 덧붙이기도 했다.

낸녀엔 메이저 대회도 우승하고 싶어

지난 98년 KLPGA프로테스를 통과하면서 국내대회에 모습을 보인 박희정은 다음해 5개의 대회에서 상금순위 9위에 머물고 말았다. 미국 프로테스를 위해 국내 경기에는 신경ㅇ르 별로 쓰지 못했기 때문이었다.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스포츠서울여자오픈에서 처음 우승컵을 안는 영광을 안기도 해 98년 골프라이터스협회에서 주는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박희정은 이 상을 받으면서 박세리의 뒤를 이을 차세대 선두주자의 자리를 굳건히 지켜나가 시작은 비록 박세리에게 뒤졌지만 세계정상정복으 ㅣ마지막은 자신이 먼저 멋지게 만들겠다는 다짐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박희정은 99년 미국으로 진출아혀 두 차례 도전 끝에 풀시드를 따냈지만 미국무대는 그렇게 쉽게 모든 것이이루어지지 않았다. 25개 대회에 참가해서 15번이나 예선 탈락하는 고배를 마셔야만 했다.

스폰서 없는 심적 부담도 그녀에게는 컸다. 미국투어 생활을 포기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박희정은 작년 12월부터 호주사람인 이한 트릭스에게 코치를 받으면서 선생님ㅇ르 다시 찾은 것 같아 자신감을 얻었다고 한다. 그리고 지난 4월에는 채널V코리아와 2억원에 1년 계약을 맺어 골프에만 전념할 수 있게되 캐나디언 오픈에서는 미국진출 이후 처음으로 톱10에 들어갔다. 여기에 자신감을 얻게된 박희정은 지난 9월에 있었던 윌리엄스챔피언쉽에서 우승,2년만에 세계 정상급 스타들ㅇ르 제치고 감격을 안았다. 아울러 15만달러의 우승상금을 획득하면서 상금랭킹 33위로 뛰어올랐다."지난해에 힘들게 보냈던 것이 약이 되어 올해는 잘 풀어 나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저를 지켜 봐준 고국 팬들에게도 감사하고요.기억에 많이 남는 선수가 되도록 더욱 열심히 뛰겠습니다." 딸과 함께 호주전역의 골프장을 돌면서 전액자비로 골프꿈나무를 키웠고 시합 날에는 캐디로,연습장에서는 무자격 코치로, 운전기사로 매일 그림자 수행을 하고 있는 박승철씨는"처음 희정이를 호주로 골프유학을 보낼 생각을 했던 이유는 미국보다 사회적을 안정된 호주에서 기본기를 닦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골프채를 잡은지 6개월만에 어린 자식을 해외로 내보배면서까지 골프를 시킨다는 자체가 모험일 수도 있었지만 저는 희정이를 믿었기에 유학을 택했고 희정이 역시 저희 가족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훌륭한 선수가 되어주었습니다.이제는 희정이의 목표인 메이저대회 우승과 최종목표인 미국명예의 전당에 희정이의 이름이 헌액될 수 있을 때까지 끝까지 뒷바라지를 해줄 생각입니다"라고 말한다.

호주 유학시절 4년 13승을 올리며 유망주로 부상한 박희정. 그리고 미국LPGA 대회에서 1승을 하며 한국여자골프가 세계 최강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킨 한해였다. 내년 메이저대회도 꼭 한번 우승하고 싶다는 그녀의 다시 한번 세계무대 정복을 위해 골프채를 움켜진다.

[자료제공 : http://www.thegol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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