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질서 新문명]①伊 정치사상가 안토니오 네그리

  • 입력 2001년 12월 31일 16시 28분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세계화 속에서 발생한 ‘9·11 테러’와 ‘테러와의 전쟁’. 이 사건 이후 세계는 앞이 보이지 않는 안개 속에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고 있다. 이 변화의 조망을 위해 세계적 지성들의 전문적 식견을 통해 각 분야에서 모색되고 있는 방안을 들어보며 세계 질서의 변동을 함께 읽어보는 시리즈를 마련했다. 첫 번째로 이 자리에 초대한 사람은 얼마전 세계화에 대한 분석을 담은 저서 ‘제국’(이학사)을 펴낸 안토니오 네그리(69). 그는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정치학자 겸 사상가로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이탈리아 로마에 살고 있는 그를 서면 인터뷰했다. <편집자>

-지난해 한국에서도 선생님의 2001년 저작인 ‘제국(帝國)’이 번역돼 나왔습니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세계화를 분석한 이 책은 상당히 전문적임에도 불구하고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호응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 이 책에서 사용하시는 ‘제국(empire)’이라는 개념은 20세기의 ‘제국주의(imperialism)’와 매우 다른 듯합니다.

“19세기와 20세기의 제국주의는 국민 국가들의 군사 경제 인구 문화의 팽창으로, 즉 국민국가들이 다른 주민들에게 자신의 주권을 강제하며 그들의 영토를 병합하는 방식으로 이뤄졌습니다. 그런데 이제 더 이상 ‘외부’를 용납하지 않는 하나의 통합된 세계인 ‘제국’이 우리 앞에 펼쳐지고 있습니다. 제국은 세계 시장을 관할하는 다수의 영역, 즉 국민국가들의 제국주의적 주권의 영역을 넘어섭니다. 제국의 통합된 세계 시장은 자신의 정치 형식을 모색합니다. 민족적 제국주의는 민족적 자본의 팽창을 추구한 데 반해 제국은 집단적 자본(모든 자본가들의 자본)의 지배를 추구합니다. 따라서 제국의 법적 질서는 더 이상 국제법이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세계 시장에 적합한 새로운 전지구적 주권 권력에 의해 운영될 것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이런 세계의 전환기에 ‘대중’과 ‘사회적 노동자’를 강조해 오셨는데 이들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국가 형태의 변경과 함께 제3의 산업혁명의 지점에서 제국이 등장합니다. 만약 정보화로 노동을 사회화하고, 공장에서 퇴출하며, 지구상의 영토와 주민들을 거의 직접적인 방식으로 동원하는 생산 양식의 이런 혁명이 없었더라면 글로벌 시장이라는 ‘제국’의 국가도 없었을 것입니다. 생산이 사회화되는 만큼 생산의 행위자는 ‘사회적 노동자’입니다. 노동이 비물질적인 노동으로, 시간의 측면에서는 유연하고 공간의 측면에서는 유동적인 노동으로 인정되면서 점점 더 지적이고 협동적인 노동이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자 계급은 더 이상 생산과 사회 안에서 주도적 지점에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착취는 더 심각하게 일반화되고, ‘대중’은 사회적 노동자들, 즉 공장에서 일하거나 육체 노동에 종사하는 노동자들과 대학에서 일하거나 정신 노동에 종사하는 노동자들로 구성됩니다. 결과적으로 ‘인민’은 주권 국가의 산물인 반면, 대중은 사회적이고 유동적으로 존재하고 직접적으로 제국과 대치하게 됩니다.”

-선생님의 말씀에 따른다면 바로 제국이 실현돼 가는 시점에서 ‘9·11테러’와 이른바 ‘테러와의 전쟁’이 발생한 셈입니다. 이 사건들은 ‘제국’화하는 세계체제의 변동에 어떤 변수로 작용하리라 생각하십니까.

“미국 정부가 주도한 패권적 정책과 미국의 일방주의를 수용하기를 거부한 것이 9·11테러의 원인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미국의 일방적 정책들이 위기에 빠질수록 미국의 일방주의는 엄청난 가속도로 진행됩니다. 부시가 이끄는 미국 정부는 러시아 및 중국과의 신성 동맹을 수용해야 할 순간에 전쟁을 미래 정책의 근간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런 최근의 복합적인 정황이 제 저서인 ‘제국’의 이론 안에 예견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세계 질서의 근본적 변화를 전망한 ‘제국’의 이론적 구조는 그 정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선생님의 이론은 ‘자율운동’을 통해 실천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자율운동의 구체적 내용을 알아야 그 이론의 실천력을 알 수 있을 것 같군요.

“자율운동은 대중에게 신체, 즉 실천적 구체성을 부여하는 프로젝트입니다. 이 프로젝트에는 적어도 세 가지의 고유한 목적이 있습니다. 첫째는 제국 내부에서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시민권을 위한 투쟁, 둘째는 세계의 모든 시민들에게 보장되는 소득의 확보, 셋째는 정보와 노동을 구성하며 모든 부를 생산하는 네트워크의 구축입니다. 오늘날 자율운동은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선생님의 저서인 ‘제국’이 학제간 연구의 모범적 성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책에는 대단히 많은 학자들의 이론들이 담겨 있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학제간 연구의 필요성을 이야기하지만 실제로는 여러 가지 면에서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그런 성과를 얻어낼 수 있으셨는지 궁금합니다.

“‘제국’의 학제적 성과는 1960년대 이래 전지구상에서 발전돼 온 전복적 운동들의 사유 안에 있던 이론적 단서들을 폭넓게 수렴한 소산입니다. 대표적인 것으로 네 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첫째로 소비에트 체계에 대한 1956년의 비판으로부터 출발한 노동 운동과 공산주의 운동 내부에서 혁신된 비판적 마르크스주의, 둘째로 제국주의로부터 해방되고 있던 나라에서 발전되고 탈식민주의 이론에서 최종적 형상을 찾은 반식민주의 사상, 셋째로 해방 사상의 발전에 존재론적 도식과 명제를 제공한 프랑스의 탈구조주의 철학, 넷째로 포드주의에서 포스트포드주의로의 이행, 즉 제3의 산업혁명을 추적했던 노동 사회학과 산업 사회학입니다.”

-선생님께서는 1979년 국가 권력에 대립하는 자율운동과 관련해 투옥되신 후에 많은 저서를 내셨습니다. 안토니오 그람시도 수감 중에 좋은 저술을 많이 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수감 중에 저술은 쉽지 않은 일일텐데….

“저는 1979년에서 1983년까지, 그리고 1997년부터 2001년까지 옥중에 있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옥중은 아니지만 집에서 수형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1983년부터 97년까지는 파리에 망명해 있었지요. 처음 수감됐을 때는 늘 특별 감방에 갇혀 있었습니다. 매주 3권의 책만 내게 전해졌지만, 고립 상태에서 연구에 전념했습니다. 감옥에서 폭동이 일어나 거의 완성된 원고가 소실되기도 했습니다. 저는 감옥에서 중요한 저서들을 썼다는 점에 큰 자부심을 느낍니다. 무엇보다도 저항 정신을 북돋우고, 삶의 욕구를 북돋우는 스피노자에 관한 저술을 했다는 것에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터뷰〓김형찬기자khc@donga.com

▼마르크스주의 토대로 현실 분석▼

◆네그리 누구인가=안토니오 네그리는 이른바 자율주의적 마르크스주의 흐름의 중심인물이다. 자율주의적 마르크스주의는 대중의 투쟁이 사회의 발전을 주도한다고 본다. 대중의 자율적 움직임을 봉쇄했던 현실 사회주의가 붕괴한 후 더 설득력을 얻고 있다.

네그리는 1933년 이탈리아 파도바에서 태어났고, 50년대 후반∼60년대 초반에는 헤겔, 딜타이, 마이네케, 칸트, 데카르트 등의 인식론, 철학, 정치학, 국가론을 연구했다. 그는 학문적 활동 외에 학생 시절 가톨릭 조직에서 활동하기도 했고, 50년대 말부터 주로 잡지 발간에 관여했다. 60년대 초반 이후에는 좌파 잡지 집단을 만들고 노동자계급과 연계를 맺었다.

특히 그는 67년부터 10여년간 자율운동의 폭발을 지켜보면서 이론적 조직적으로 개입하게 된다. 이 시기에 네그리는 자본주의 위기론 및 국가론을 발전시켰고 이탈리아공산당의 주장을 전면적으로 비판하며 자율적 조직화 방식을 주장했다.

70년대 말 무장 조직과 국가 권력의 대립 속에서 자율적 대중운동이 탄압받으면서 네그리 또한 수인이 됐지만, 급진당 의원으로 당선돼 사면된 뒤 프랑스로 망명했다. 그는 푸코, 들뢰즈, 가타리 등과 교류하며 프랑스의 포스트모더니즘적 사고에 접하면서도, 여전히 마르크스주의적 틀을 확장해 가면서 현실을 분석했다. 특히 지배 권력에 대항해 대중이 지닌 잠재력인 ‘역능(力能·puissance)’을 강조하며, 욕망에 기초한 대중의 자율적 구성 과정을 긍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런 인식 위에서 네그리는 최근 마이클 하트와 함께 탈근대 세계의 지배자로서 제국의 그림을 그렸다. 전지구화와 더불어 나타난 새로운 변화 양상을 적극적으로 평가하고 그 위에서 대중의 새로운 움직임과 저항에 주목한 것이다. 국민국가의 쇠퇴와 세계시장의 지배 속에서 자본의 초국적 이동과 국제적 기구들의 확장을 통해 형성되는 제국과, 그 속에서 제국의 포획장치에서 벗어나려는 대중의 다양한 몸부림을 대비시켰다.

그의 이런 관점은 세계의 흐름을 지배자의 측면에서만 보았던 기존의 관점들을 비판하고 대중의 자율성에 주목한 것이다. 권력장악이라는 승리게임에 매이지 않고 대중의 창의성을 낙관하는 것이다.

윤수종<전남대 교수·사회학>

◆네그리 어록

▽“제국은 영토와 주민을 관리할 뿐만 아니라 자신이 존재하는 바로 그 세계를 창조한다. 제국은 인간의 상호 작용을 규제할 뿐만 아니라 인간 본성을 직접 지배하려 한다. … (그러나) 제국을 떠받치는 대중의 창조적 힘은 대항 제국을, 즉 전지구적인 흐름과 교환에 대한 대안적 정치조직을 자율적으로 구축할 수 있다.” -‘제국’(이학사) 중에서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의 입장에서는 생산관계의 총체에 대해 무엇이 새로운 것인지 정의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자동화를 더 이상 생산적 노동의 착취 과정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분석할수없고, 오히려 사회적 관계 전체의 수정이라고 파악해야 한다. … 생산의 사회화는 사회가 자본 그 자체에 의해 착취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배와 사보타지’(새길) 중에서

▽“국가의 새로운 형태는 국제법의 지형 속에서, 시장의 새로운 공동체적 질서화 속에서, 국내의 입헌적 법 속에서, 그리고 새로운 사회적 법 속에서 동질적 방식으로 재현된다. … 국제법의 기반과 새로운 세계질서의 논리는 한편에서는 세계시장을 배치할 자본주의적 필요성에 의해, 다른 한편에서는 핵무기들의 치명적 권력에 의해 재현된다. -‘디오니소스의 노동’(갈무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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